요한이 말하는 모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궁극적으로 구원으로 수렴된다. 이것은 기독교 초기에, 예수가 누구인지 완벽하게 알기 때문에 그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후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기독론으로 발전해 간 신학사 가운데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거듭날 때만 가능하다(요 3:5).
더 나아가 구원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천국을 보장받는 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예수를 통해 구원을 확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도 생명을 받은 자로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어둠과 죽음에서 생명의 빛으로 옮겨 진 자녀들은 지상에서 예수가 행하셨던 사랑과 봉사를 그분의 새 계명에 따라 실천하게 된다. 또한 그렇게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께 붙어 있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면 미래의 ‘생명의 부활’까지도 약속받게 된다.
믿음과 생명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생명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한은 ‘믿음’을 통해 ‘생명’이 주어지고, ‘생명’은 ‘믿음’의 결과임을 피력하고 있다. 즉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요 3:15).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많은 사람이 그들 스스로 ‘보고’, ‘듣고’, ‘아는 것’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때로는 세상 가운데 ‘환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생명을 제공하는 믿음은 결국 환란 가운데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하나님과 예수에 대해 상반된 두 종류의 반응을 보도한다. 하나는 독생자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영생을 불러온다. 반면 다른 반응은 독생자를 무시하고 ‘믿지 않는 것’이다. 결과는 심판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라고 말하며,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각자의 선택의 결과는 확연하게 달라짐을 말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는 말씀은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주어지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게 된다. 여기서 “머물러 있느니라”와 “영생을 가졌나니”는 현재형으로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닌 현재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즉 ‘진노’와 ‘영생’ 이미 실현되고 또한 앞으로 계속할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모세의 율법에 상응하는 수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 이해를 놓지 못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것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 열두 제자들과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 마리아, 나사로 등은 예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생명의 제자직을 수행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생명은 매우 명확하다. 생명의 기원인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 자체가 영원한 생명의 전부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자신의 말이 곧 생명’(요 6:63)이라는 대전제를 제시한다. 따라서 제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인 유일한 방법은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요 5:24). 이것이 참된 제자의 유일한 지표이다(요 8:31).
세상과 생명
요한복음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하며, 저자에 의해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상을(요 1:3, 10) 받아들인다. 그리고 ‘세상’은 단순히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물리적인 우주, 즉 이 땅을 말한다기보다는 죄로 인하여 어둠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유대적 또는 헬라적 이분법에 따라 하늘은 거룩한 곳, 세상은 죄악된 곳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요 3:16). 예수는 세상의 구세주이며(요 4:42),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신다(요 17:18). 또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서 세상에 생명을 줄 것으로 기록된다(요 6:14). 반면 세상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했고(요 1:10), 제자들을 미워하였고(요 15:18), 예수와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요 17:4). 그리고 그들을 환란으로 몰아넣고(요 16:33) 핍박할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세상은 그 자체로 악은 아니지만, 악을 향하고 악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기록한다. 요한은 시작부터 악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생명이 없음으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세상은 어둠 그 자체였다(요 1:5).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며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악이 가득한 공간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등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를 보낸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즉 멸망이 목적이 아니라, 그 공간 가운데 하나님은 생명을 주길 원하신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과 상관없이 세상의 빛이다. 스스로 말씀하시길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빛’을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태양의 빛으로 물리현상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 계시의 빛으로 영적인 현상을 볼 수 있다. 세상이 빛이신 예수의 계시를 소유한 자는 생명을 얻게 된다.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로 걷게 된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요 8:23). 다만 이 땅에 생명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세상에 말하기 위하여 오셨다(요 8:26). 예수는 또한 세상에 말할 뿐만 아니라 어둠에 갇혀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리를 보게 한다(요 9:39). 그러므로 온 세상이 예수를 따르게 될 것이다(요 12:19). 예수를 따르는 자는 세상 가운데 어둠에 거하지 않게 될 것이다(요 12:46).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는 분이기 때문이다(요 12:47).
종말과 생명
요한은 종말론적 생명과 관련해 ‘믿음’, ‘인자’, ‘성령’, ‘심판’, ‘하나님과의 일치’, ‘파루시아(재림)’, ‘이 세상의 임금’등 다양한 주제와 관련지어 사용한다. 이때 예수는 종말적 심판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주제들은 종말의 현재 의미와 미래에 대한 언급들이 같이 사용된다(3:17; 5:26~30; 6:39~54; 8:16; 12:47). 요한은 5:26~29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언급하며 마지막 종말에 생명과 심판이 대조되어 구분됨을 말하고 있다.
육신을 입고 있을 때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그에 의해 소생된 자들은, 충만한 부활 생명으로 부르는 음성을 다시금 들을 것이다. 하지 만 생존 시에 하나님 아들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은 자들은 결국 그들에게 선고되는 유죄 판결을 듣도록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지막 날의 부활은 각자가 생존 시에 만들었던 결정을 드러낸다. 그것은 ‘선한 일-즉, 예수를 믿는 자’는 마지막 때에 생명을 얻고 ‘악한 일-즉, 예수를 거부한 자’는 마지막 때에 심판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과 생명을 결정하는 심판자이시다. 종말적 하나님의 심판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통해 실행되며 이때 아버지와 아들은 구분되지 않고 동일시된다. 아들이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 아버지의 심판을 모면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종말적 심판자이신 예수는 미래의 심판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현재 세상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요한은 전통적으로 유대의 묵시적 종말이 가지고 있는 미래의 공포스러운 심판의 이미지(3:19)를 수정해 예수의 말씀 선포를 통해 즉각적인 심판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요한복음 5:24에서 세상은 예수님과의 만남과 그의 말씀들을 들음을 통해 심판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가 하시는 심판은 특정 사건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예수 자신과 그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순간이 곧 종말의 순간이다. 그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제공되지만, 그의 말씀에 등을 돌리는 자들은 즉시 죽음의 심판이 수여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죽음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한 채 영접하지 않는 세상은 종말의 관점에서 심판의 결과 이미 죽은 자들에 해당한다.
현재적 종말과 함께 요한은 성육신으로 촉진된 구원을 향한 수직적인 접근을 드러낸다. 구원을 목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요 1:14) 인자는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왔다(요 3:13). 그의 생애의 정점은 그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늘을 향해 올려 질 때이다(요 12:32).
요한은 지속해서 두 세상을 대조한다. 단순히 공간적이 아닌 질적인 대조, 위의 세상과 아래 세상(요 3:3; 3:31; 8:23), 영에 속한 영역과 육에 속한 영역(요 3:6; 6:63) 등이다. 예수님은 일상적인 물과 대조되는 생명의 물이다(요 4:10-14). 또한 다른 세상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 사는 그의 백성에게 가져 다주어 사망이 생명을 다스리지 못하게 한다(요 11:25). 이러한 구원에 관한 수직적인 접근은 무시간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요한은 구원의 역사를 수직적인 접근과 더불어 수평적인 접근도 드러낸다. 예수님을 지향한 “때”에 대한 언급을 요한복음에서 자주 접한다(요 2:4; 8:20; 12:23 등).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과 승천의 때는 하나님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요 19:28)” 절정의 때이다. 또한 마지막 장인 21장은 부활한 예수의 재림을 말한다. 이처럼 구원에 관한 요한의 견해는 수직적이며 동시에 수평적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는(요 19:28)” 절정의 때이다. 또한 마지막 장인 21장은 부활한 예수의 재림을 말한다. 이처럼 구원에 관한 요한의 견해는 수직적이며 동시에 수평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