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선교와 신령한 나눔

문의 설렘
설렘은 기분 좋은 감정이다. 필자는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설렘을 갖는다. 결코 무거운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다. 굳이 무엇을 준비해서 보여주려고 가는 방문도 아니다. 이런 표현까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실 선교지 사역자들과 놀러 간다는 말이 내게는 더 맞을 것 같다.

힘겨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선교사들은 나의 방문에 얼마간 쉼을 얻는다. 설교를 대신하기도 하고 노동도 함께 하며 다녀올 곳이 있으면 같이 갔다 온다. 오가면서 이런저런 삶과 일에 대한 말들을 들으며 기도할 내용을 찾는다. 많이 말하지 않고 많이 들어준다.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 든다. 손님이 왔다고 준비한 것은 함께 즐긴다.

가능하면 충분히 손 대접하게 하고 떠날 때 넉넉히 보상한다. 아니, 무엇을 주고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함께 지내는 시간이 편하고 좋게 만들도록 하는 게 내 방문의 목적이다. 선교지 동역자들에게 나를 만남이 행복한 시간, 다시 또 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나의 단기 여행이다.

필자는 사역(doing) 이전에 존재(being)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를 세상의 빛이라고 명명한다(마5:14). 빛은 숨겨지지 않으며 존재 그 자체로 주변을 밝힌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에 신령한 은사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셨다(롬 12장, 고전 12장 등). 모든 하나님의 자녀 각 사람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좋은 것들을 은사로 받은 자들이다(롬8:32).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좋은 것을 공유한 빛무리이다. 당연히 선교지 사역자들은 빛들로 거기에 존재한다. 대단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지닌 이들로 각자 있는 것을 빛내고 있다. 이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빛의 원천이신 예수님과 자신의 교제를 깊게 갖는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더욱 빛나려면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성령님이 보내신 빛의 사자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

안디옥 교회를 이끌던 이들을 성령님이 명하여 선교지로 보내셨다. 세상의 빛무리로 존재하는 이들을 섬기던 이들이 빛의 사자가 되어 선교지로 향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있는 곳에서 빛으로 사역하던 이들이 먼 곳으로 떠나도록 인도를 받는다. 원래 있던 곳에서 잘해야 다른 곳에 가서도 잘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잘 한다는 뜻은 무슨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계의 친밀함을 의미한다. 빛으로 존재해야 빛의 역할을 한다. 빛이 밝아야 주변을 밝힐 수 있다. 인디언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자신이 누구도 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해냈지만 그의 일기를 빽빽이 채우는 내용은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그날 어떠했느냐이었다.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는 성령님의 명을 따라 빛의 사자로 파송된 이들이 각자 자신에게 허락된 그곳에 빛으로 존재하며 예수님과 밀도 있는 사귐을 갖는 것, 이것이 선교다. 여기에 더해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어떤 일을 전개한다면 그것이 선교지 사역이다. 자연스레 존재(being)가 일차 사역이며 삶의 활동(doing)이 보완(이차) 사역이다. 필자의 짧은 경험 세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회가 파송 한 선교사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은 존재에 대한 지각 혹은 각성이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입어 교회의 일원이 된 후 신학 과정을 거쳐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되었다. 어언 40여 년을 지나고 있는 지금 필자가 가지는 지역 교회에 대한 전체적 느낌은 빛에 속한 이들이 ‘무언가 어둡다’라는 생각이다. 왜 그럴까? 상식적으로 빛이 어둡다는 문장이 성립되지 않음에도 어찌하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의 얼굴이 어두운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표현처럼 인생의 수고와 슬픔이 교인들의 어깨와 마음을 무겁게 눌러서 세상 근심 다 진 것처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사는 걸까?(시90:10)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자, 주의 영을 모시고 사는 이에게 참된 자유가 있음을 증거 한다(요 8:32, 고후 3:17). 그렇다면 진리의 공동체요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교회는 자유를 알고 누리는 자들이다. 이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이고 모든 사탄의 지배로부터의 자유다(롬 8:2, 엡 2:1-10). 이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계시되고 있음에도 이 계시된 진리를 믿는다는 이들이 여전히 어두운 모습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화의 과정 중이라 그런 것인가?

이런 연유로 필자는 지역 교회로 모이는 이들에게 어떤 사역을 요구하기 전에 우선,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무슨 일을 잘하도록 요구받는 것보다 선결되어야 한다. 이 부분이 뚜렷해질수록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는 교회, 이 교회가 파송하는 빛의 사자인 선교사가 더욱 그리스도의 나라를 힘 있게 세울 수 있음을 필자는 믿는다.

선교, 은사를 나누기 위해 오가는 여행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롬1:11)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로 가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신령한 은사들을 나누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에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울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의 일군은 자신에게 허락된 신령한 은사들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되려고 한다. 이것을 조금 더 넓은 영역으로 가져가는 것이 선교 여행이다. 누구든지 자신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나누러 가는 데 설렘과 즐거움이 어찌 없겠는가!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늘 나누기를 즐겨하는 예수님의 좋은 것들을 선교지로 가져간다. 거기에 세워져 있는 이곳저곳의 교회들과 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나눌 때 저들의 얼굴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자신들이 사는 곳과는 아주 먼 곳에서 온 이가 자신들처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함께 예배를 드리는 순간들이 저들의 신앙을 강건하게 세워주는 역할을 한다.

사용하는 말도 다르고 피부 색깔도 다른데 예수님을 잘 안다 그러고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자고 권하니 믿음에 힘이 생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평소에 이웃을 초대하여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마침 멀리 선 온 전도자가 왔으니 좋은 기회라 여겨 마을의 많은 이들을 불러 복음을 전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열정도 지혜도 방법도 서로 배움의 시간이다.

만나면 좋은 친구!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벗이 있어 먼 데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많은 이들이 아는 문장이다. 지역 교회의 어떤 이들이 먼 곳 선교지의 어떤 이들을 방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친구 간의 만남과 같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이 만남을 적극 주선하며 거의 매주 광고 시간에 선교에로의 초대를 계속한다. 한해는 교회가 단기 팀을 꾸려서 복된 만남의 곳으로 떠나고 그 이듬해는 그곳의 사역자를 청하여 교회와 사귐을 갖는다. 지난해는 갔다 왔고 올해는 초대했으며 내년에 다시 갈 팀이 격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여기에 얼마간의 부담 같은 게 있을지라도 성령님이 주시는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교회와 선교사) 안에 이보다 빛난 만남 거룩한 사귐 아름다운 나눔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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