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기록이 증언하는 퍼시 리오넬 스미스 사관

첫 한인이민교회라는 풍성한 열매를 만들어 내

한 알의 밀알
“뉴질랜드에 왜 이렇게 한국교회와 한인 목사들이 많은 것이죠?” 오래전에 우연히 만난 한 중국 사람에게 들은 질문이다. 내 직업을 물어보길래 한인교회 목사라고 대답했더니 오히려 나에게 반문을 해 온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답을 해 주었다.


“나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나 중국 사람들은 식당을 차리고 한국 사람들은 교회를 시작한답니다.”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 정착하든지 교회를 세운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한인교회들이 그냥 쉽게 시작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에 처음 복음이 전파될 때 수많은 희생이 있었던 같이 한국 이민자들이 정착하는 곳에도 분명 누군가의 눈물과 사랑이 뿌려졌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뉴질랜드에 한인 이민자들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100개가 넘는 한인교회들의 시작도 단 하나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웰링턴에서 한인들이 처음 모여 교회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목사를 초청하여 시작된 것이 그 시작이고 이제 40주년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첫 번째 한인 이민자의 교회도 그냥 저절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 한인 이민자들의 교회에 눈물과 사랑을 뿌려준 밀알 같은 고마운 분이 계신다. 퍼시 스미스라는 구세군 사관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생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얼마 전 크리스천라이프로부터 한인 이민교회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퍼시 스미스 사관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아버지 때부터 웰링턴에서 오랫동안 한인들을 도와 왔던 데이비드 씨였다. 나는 당장 데이비드 씨와 그 아내 홍의숙 씨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자료를 함께 찾아 주었다.

우연이었을까?
신문 마감일은 다 되었고 스미스 사관의 출생과 무덤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던 밤에 데이비드 씨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이메일을 공유해 주었다. 몇몇 자료들이 언급되어 있었지만 실제 자료들을 볼 수는 없었다. 한밤중에 다시 데이비드 씨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보내준 이메일에 언급된 자료들을 꼭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나는 첨부파일과 함께 다시 이메일을 받았다. 찾았다! 스미스 사관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는 그의 장례식 순서지가 도착했다.


퍼시 리오넬 스미스(Percy Lionel Smith)는 1909년 7월 29일 오아마루(Oamaru)에서 출생했다. 그는 원래 정육점을 운영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1932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약혼자와 함께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대하여 그의 본격적인 하나님 나라 사역이 시작됐다.

퍼시 스미스 사관 부부


그는 약혼자였던 클라리스(Clarice)와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고 구세군 사관으로 봉사하던 중 1950년 한국전에 참가하게 된다. 뉴질랜드 정부는 Kay Force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1950년 새해가 시작되기 전날 밤에 부산에 도착하게 됐다. 제27 영국연방 보병 여단에 합류한 뉴질랜드 파병부대 Kay Force에 스미스 사관은 한국전에 참전했다.


끔찍한 전쟁에 참전한 경험은 스미스 사관의 또 다른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준비였다는 사실을 스미스 사관은 잘 모르고 있었다. 뉴질랜드로 돌아온 스미스 사관은 계속해서 구세군에서의 사역을 이어 갔다. 웰링턴, 센트럴 노스, 오클랜드 지역의 청소년 담당 부서의 비서직과 홍보 담당관으로 봉사했으며 특별히 스카우트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후에 공로 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65세의 나이에 스미스 부부는 구세군에서의 공식 복무에서 은퇴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5년 만에 한 낯선 사람이 스미스 사관 집의 문을 두드린다. 영국 선원 협회에서 찾아온 것이다. 영국 선원 협회에서 스미스 사관에게 웰링턴 항의 담당 목사가 되어 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이 협회는 해외 각지에서 웰링턴 항에 정박하는 선원들에게 영적 그리고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며 복음을 전하는 단체였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에 한국의 오징어잡이 원양어선들이 점점 더 많이 웰링턴 항을 방문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결국 한국전에 참전하여 한국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뜨거웠던 스미스 사관과 한국인 선원들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스미스 사관과 한국인 선원들의 만남에 대하여 구세군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War Cry 1995년 6월 10일 자에 리차드 스미스 소령이 쓴 글에는 구체적인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


“기간 동안 주님의 축복은 그의 사역에 풍성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한국 오징어잡이 배 선장 두 명이 “클럽”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날의 설교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가서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 후, 그 두 남자는 8명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영접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8명은 남극해의 오징어잡이 배에서 비좁고 흔들리는 환경에서 살고 일하면서 두 선장의 증언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스미스 중령이 선원들과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 기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82명의 개종이 기록되었으며, 25명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원 협회 사역의 하나로 스미스 중령은 웰링턴에 최초의 한인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할 특권을 누렸으며, 한국인 목사의 이민을 후원할 수 있을 때까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


우연이었을까? 우연으로 보기에는 그 열매가 너무 분명하고 풍성하다. 하나님은 스미스 사관을 한국전까지 참전을 시키셨고 그 마음에 본 적도 없던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차가운 바다를 떠돌며 외로운 인생의 고비에 서 있는 한국인 선원들의 마음을 스미스 사관의 뜨거운 사랑으로 녹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스미스 사관은 은퇴한 후에 한인들에 대한 사역으로 더 바쁘고 뜨거운 시간을 보내게 됐다.

충성의 열매들
구세군 ‘War Cry’ 잡지에 실린 글에서처럼 스미스 사관이 운영하던 선원 예배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 예배를 통해 모이고 변화되던 한인들은 한국인 목사를 한국에서 초빙할 만큼 성장했고 그렇게 첫 번째 한인 이민자 교회가 뉴질랜드에 시작된 것이다.

김경룡 수산관 가족


웰링턴에 사는 많은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미스 사관은 그 한인 이민자 교회의 중요한 행사 때마다 함께 하며 사랑을 나누었고 그렇게 90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또 다른 부르심에 따라 소천했다. 1999년 11월 26일에 있었던 그의 장례식 순서지에는 “영광으로의 승격” (Promoted to Glory)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하나님의 군사여 잘하였다”(Soldier of God, well done)라는 글자를 남겼다.

스미스 사관이 선원 세례식에 통역한 고금숙 씨와 남편 클락슨(좌)


이민 온 지 29년 만에 그리고 이민교회 목회에 몸을 담고 28년 만에 비로소 왜 이 땅에 이렇게 많은 한인 이민자 교회들이 있는지를 깨닫게 됐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평하는 100개가 넘는 한인교회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이 그 시작부터 분명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해외 나가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충성과 눈물과 희생이 뿌려져서 나타나는 열매가 분명하다. 그렇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은퇴 후에도 멈추지 않았던 스미스 사관의 충성이 결국은 뉴질랜드에 한국인 이민교회라는 풍성한 열매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강성준 목사<웰링턴 그리스도의 편지교회>

1985년 부산 선원선교회 방문한 스미스 부자와 관계자들

한국인의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 온 스미스 사관

1950년-2025년은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이 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뉴질랜드군 군목으로 파송한 스미스 사관이 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나서 1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한국 원양 어선이 웰링턴에 정박할 때마다 선원 선교를 하면서 정착하는 한인을 위한 웰링턴 한인연합교회를 세워 영혼 구원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편집자 주>

퍼시 스미스 사관. 1980년 대 즈음부터 그를 기억하는 한인들의 대부분은 웰링턴에 정착하면서부터 선원회관에서 드리는 예배와 교제를 통해서였다.


그는 1950년 한국전에 참전한 뉴질랜드군의 군목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이 끝나고나서도 전쟁의 비참함을 겪으며 외상후 장애를 가져 심장병이 생겼다는 말도 있다.


한국전의 참상은 이루말 할 수 없는 황폐함과 황량함을 주어 마치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사는 곳인가?’ 라는 믿을 수 없는 처참함이었다는 그의 말을 들은 한인이 전하기도 했다.


1950년의 한국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여름 군복을 입고 온 뉴질랜드군에게는 힘든 전투가 계속됐다. 삶과 죽음의 전장에서 뉴질랜드군을 위한 예배를 통해 용기와 믿음을 전했던 스미스 사관.

1980.12.21 베풀어진 세례식, 오른쪽 끝 변경숙 씨

한국전쟁이 끝나고 선원으로 찾아온 한국인 맞아
스미스 사관은 웰링턴 선원회관에서 다양한 국적의 선원을 위한 전도와 예배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던 그는 한국인 선원을 위한 관심과 헌신으로 복음 전도에 힘을 쏟았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한국 선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결신하는 선원에게는 세례도 주었지만, 그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고 다시 새로운 선원들이 그 자리를 이어나가기에 한국의 선원들 사이에 더 잘 알려져 있다.


1980년부터 스미스 사관을 도와 통역을 했던 고금숙 씨는 약 15명의 한인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콜롬보 플랜 영어 교사 과정을 위해 웰링턴에 왔다가 클락슨 씨를 만나 웰링턴에 정착하면서 선원 선교와 웰링턴 한인연합교회 설립을 도왔다.


1980년에는 변경숙 씨가 월슨과 한국 서울에서 결혼한 다음에 웰링턴으로 와서 살면서 한국인 선원과 정착하는 한인 사회의 거주 이민 가정이 됐다. 스미스 사관은 웰링턴 선원회관을 통해 선원 선교를 계속했다.

스미스 사관에게 받은 변경숙 씨 세례증서

스미스 목사님이라 불렀던 한인들
변경숙 씨가 웰링턴에 온 1980년에 만난 스미스 사관은 자그마한 키에 언제나 검은색 구세군 제복을 입고 부지런히 다니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변경숙 씨와 결혼한 월슨 씨도 주일 오후 3시 30분 웰링턴 선원회관에서 스미스 사관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한국 원양어선은 웰링턴 항구에 들어와 3일만 머물었다. 선원들이 웰링턴에 오는 주일에는 함께 예배를 드렸다. 스미스 목사의 영어 설교는 이해하기엔 매우 어려웠지만 그래도 마음 속에선 매우 감사하며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그 당시를 회고하며 말하는 변경숙 씨.


비바람이 세차게 내리치는 차가운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외출하지 말고 집안 일이나 해야지 하면서 방 안을 살펴보던 변 씨는 뜻밖에 1980년 12월 21일에 발행된 서류를 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스미스 사관에게 처음 받은 세례 증서였다.

원인 모를 병으로 수술할 때마다 기도해 준 목사님
1981년 2월 첫 아들을 낳은 변 씨는 잘 자라는 아들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도 없고 병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해 4월부터 여러 번의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 누워 있으면 천정에 매다린 둥글고 커다란 전등을 볼 때마다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수술을 할 때마다 꼭 찾아온 스미스 사관이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하면서 이제는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지만 다시 아프기 시작하였다. 수술을 여러 차례할수록 몸도 마음도 지쳐 육아를 도저히 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하나님까지 원망하기도 하였다.


결국 여러 번의 수술 중에서 마지막 수술할 때는 미국에서 들여온 첨단 수술 장비를 사용하여 원인이 된 물질을 찾아내어 제거하고 끝이 났다.
변 씨는 자신의 일생 가운데 가장 아프고, 힘든 상황이었다고 그 때를 회상한다.

윌슨의 준호 첫 돌에 온 스미스 부부

아플 때 조용히 찾아와 기도해 주는 퍼시 스미스 사관
아픈 처지를 알고 유일하게 수술실에 찾아와 기도해 주고 위로해 준 스미스 사관, 그 당시는 너무나 지치고 아퍼서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조차 못해 아쉽다는 변 씨.
그러고보면, 그 때 스미스 사관의 부인도 많이 아픈 상태였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도 아내 병 간호를 하면서 손수 운전하고 다니면서 한국 선원들과 거주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993년에 월슨 가족은 오클랜드로 이사를 오고 스미스 사관이 소천하였다는 소식도 나중에 듣게 되었다.

복음에 열심인 기독인이 오면서 공동체가 든든해져
변씨는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웰링턴에 파견온 김경룡 수산관 가족의 적극적인 예배와 모임을 도우면서 정착한 한인들과 웰링턴에 잠시 정박하는 한인 선원들과 같이 어우러지는 역할을 했다. 1985년에는 부산의 선원선교회를 방문한 스미스 사관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동행했다. 스미스 부자가 부산에 올 때 김 수산관은 반갑게 만났다.


김경룡 수산관 가족이 귀국하고 1983년부터 웰링턴 재뉴 한국대사관에 안경순 영사 가족이 1985년까지 있으면서 한인사회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함께 모이기를 힘쓰면서 웰링턴 한인연합교회가 정식으로 뉴질랜드 종교성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스미스 사관은 이 모든 교회 활동의 목양을 감당하다가 한국인에 의한 목회자가 필요하기에 교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뉴질랜드 장로회의 도움으로 한국인 목사를 한국장로회에 초청하게 되어 김용환 목사 가족이 1985년 10월 웰링턴에 오게 되었다.


그동안 선원 회관에서 드리던 한인예배를 1985년 12월 16일 세인트 앤드류장로교회로 옮겨 드리게 되었다.
선원회관에서의 선원 선교는 스미스 사관에 의해 지속되고 한국 선원을 위한 예배 통역은 고금숙 씨가 여러 해 동안 감당하였다.

<이승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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