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이 시대의 문둥병,‘외로움’

야생 야생동물을 연구해온 한 과학자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첫 소설을 출간했다. 델리아 오언스(Delia Owens)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 (살림출판사: 경기, 2024, p.474)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깊이 있게 다룬 것은 인간의 ‘외로움’이었다.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카야
6살 밖에 안 된 소설의 주인공 여자 아이, 카야는 5남매 중의 막내였다. 어느 날 엄마가 카야를 버리고 판잣집을 나가 버렸다. 아빠의 폭력 때문이었다. 뒤이어 큰오빠와 언니 둘도 홀연히 집을 떠났다. 카야와 함께 남아 있던 작은 오빠 마저도 아버지한테 심하게 맞고서 “나 떠나야 해, 카야 여기서 더는 못 살겠어” 하며 떠났다.


모두 아빠 때문에 떠났다. 술주정뱅이에다 도박 중독자였던 아빠는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 아빠도 결국 카야 곁을 떠나고 말았다. 카야도 집을 떠날 생각을 해봤지만, 어린 나이에 갈 데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족들 중에 멘탈이 가장 강한 사람은 카야가 아니었을까? 끝까지 집을 지킨 사람은 카야 뿐이었다.

습지에서의 외로운 삶
홀로 남은 카야가 사는 곳은 마을이 아닌 습지였다. 이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 카야는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보트를 타고, 조개를 캐고 그것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어느 날 카야는 이렇게 말했다.
“갈매기랑 왜가리랑 판잣집을 떠날 수는 없어. 나한테 가족은 습지뿐인걸.”
“인생은 혼자 살아내야 하는 거라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어. 사람들은 결코 내 곁에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격리가 내 인생이었어.”


카야가 외딴 습지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카야를 비하하는 의미로 ‘마시 걸’(‘습지 소녀’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고립되어 살았던 카야는 그들로부터 쏟아지는 반감과 편견을 감당해야만 했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카야, 법정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다
카야가 한 때 사귀었던 체이스 앤드루스라는 남자를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카야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었다는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지루한 법정의 판결과정 때문에 카야는 기진맥진했지만 다행히 무죄로 판결 받았다. 이후 카야는 마을사람들로부터 심한 냉대와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때 작은 오빠와 카야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두 달이 아니라 한평생을 혼자 살았어! 그리고 온 마을이 나를 적으로 돌렸다고 생각한 게 아니야. 사실을 알았을 뿐이야!”
“카야,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사람들한테서 더 멀어지면 안 돼. 사람의 영혼까지 쥐어짜는 시련이었지만 새 출발할 기회일 수도 있어. 평결은 그들 나름대로 너를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엄마가 카야에게 독려하며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그냥 저 숲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 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혼자 고립된 삶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며 서로 품어주는 삶일 것이다. 혼자 사는 것은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다.

작가도 이 책『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인간은 외로워서는 안 되는 존재로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또한 인간을 부당하게 격리하거나 사회적 약자로 차별하는 편견이 큰 문제라고 고발한다.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세상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뻐하셨다. 하지만 아담을 창조하신 후, 아담이 독처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영적으로 침체상태에 있었던 선지자 엘리야.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주시기를 구하였다. 엘리야는 혼자였다. 오직 자기 자신만 남았다고 하소연한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도 혼자였다. 물을 길으러 제일 더울 때에 우물가에 찾아간 이유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동네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여인 옆에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결국 외로움이 문제다. 마더 테레사는 ‘이 시대의 문둥병은 외로움’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영적 가족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터치(인간미)가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 일 수 있다. 처음에 혼밥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유행하고 있다. 결국 삶이 편리해졌지만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외로움 때문에 삶이 공허해지고 힘들어질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지만 대화가 점점 줄어들고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식사를 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AI가 발전하고, 개인주의 삶이 중요해질수록 오히려 따뜻한 인간의 정이 더 그리워지지 않을까? 따라서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하신 말씀과 같이 영적인 식구들이 필요하다.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보통 교회의 롤 모델은 사도행전 2장 초대교회에서 찾는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행 2:42). 초대교회의 특징은 ‘서로’, ‘함께’, ‘같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여 음식과 은혜를 나누며 자주 교제했다. 무엇이든 혼자 하면 힘들지만, 함께 하면 수월하다. 현대사회의 병적인 이 외로움을 초대교회와 같이 건강한 소그룹을 이루어 이겨낸다면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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