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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서문(1:1-18)에 나타난 신학

카슨(D. A. Carson)은 요한복음 서문이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구절 중의 하나로 요한복음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현관과 같다고 말한다. 이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서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속사 틀 안에서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예수의 증인들, 요 13:1)와 구약 성경의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후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현시(요 2:11), 그리고 그 현시에 이끌린 사람들의 확신(요 6:68-69; 17:6-19), 세상의 빛(요 8:12)과 생명으로의 역할(요 11:25),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세상의 불신앙(요 12:39-41), 하나님 아들의 선재(요 17:5) 등으로 이어진다.

서문의 처음 열여덟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 λόγος)으로 선포하며, 창조와 구원 그리고 성육신의 핵심 진리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 사용된 용어들 “말씀”, “생명”, “빛”, “영광”, “은혜와 진리” 등 계시의 개념들은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 성육신한 로고스의 이야기로 결론지어진다. 특히, 마지막 1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며,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음을 선포한다.

창조 신학: 말씀(로고스)과 창조의 연계성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는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반영한다. 유대교 유일신론의 정체성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유대교의 창조신앙은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창 1:3), 하나님 홀로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만물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만물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요한복음은 기독교 유일신론의 출발로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명확히 한다. ‘말씀(로고스)’은 그리스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우주를 질서 있게 만드는 이성과 원리로 이해되었다. 요한은 이를 차용하지만, 인격적 존재로 재해석한다. 즉 그리스도가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로, 로고스의 궁극적 실체로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명확히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기초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특별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 1:3)는 골로새서 1:16-17과 신학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말씀이 창조 행위의 주체였음을 선언한다. 이는 모든 창조물의 기원과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창조가 단순한 물질적 생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의도가 담긴 행위임을 의미한다.

구원 신학: 생명과 빛
요한복음 1:4-5, 9에서 말씀은 ‘생명’과 ‘빛’으로 묘사된다. 이는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원 신학의 핵심 개념이다“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는 진술은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라는 진술과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 11:25)이라는 선언과 연속성을 가진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원천임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의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을 넘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이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는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곧이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는 진술로 구속의 긴장을 드러낸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를 상징하며, ‘어둠’은 죄와 무지를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요 8:12)으로 선포되며, 빛은 하나님의 구속적 개입을 의미한다. 반면에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거나 저항하지만, 요한복음은 궁극적으로 빛이 승리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계시 신학
성육신의 신비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요한복음 1:14를 서문의 클라이맥스로 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주제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나타낸다.

성육신은 추상적 개념으로 존재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온 사건이다. 즉 말씀은 타락한 창조물을 구속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온 존재이다. 성육신은 단순한 신학적 선언을 넘어,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을 함께 하시기 위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에서, 이 ‘육신’은 하나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인 인간이 지닌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천상의 존재성(신성)이 멈추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단지 그의 본질적인 존재에 하나의 새로운 존재 양식인 인성을 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욱 인격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요한이 사용한 “거하시다”라는 단어는 ‘장막을 치다’, ‘거처를 정하다’라는 뜻으로 구약의 성막에 어원을 둔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한 가운데 위치한 성막에 거하셨다. 모세는 ‘회막’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출 33:9, 11).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때보다 더욱 친밀한 방식으로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전의 장막을 대체하는 새로운 성전임을 증거한다. 즉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으며,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체적으로 구현한 새로운 성막·성전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는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임을 선언한다.

계시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정의한다. 그동안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요 1:5), 알지 못하였지만(요 1:10), 그 아버지의 독생자가 말씀의 성육신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났음을 본 교회가 그것을 증언하며 절정으로 선포하는 것을 믿음이라 한다.

때문에, 이 믿음은 우리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를 뚫고 들어옴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서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육신으로 전달한 계시는 이전에 있었던 구속사의 사건들 즉, 창조 사역과 하나님의 임재의 현현,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수여에 대해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더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
요한복음 전체와 관련하여, 서문에 나타나는 또 다른 주제는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요 1:12)가 된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자기 백성, 우리, 제자들)의 등장을 예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많은 유대인을 포함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자들에게는 믿음의 동기가 되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의 저술 목적과 조화를 이루며 서문의 기능과 일치한다.

이러한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와 관련하여, 요한은 이스라엘을 가리켰던 ‘하나님의 자녀’라는 구약 특유의 표현을 가져다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적용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지만 역설적으로 서문에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기 백성”(요 1:11)으로 불리지만 메시아인 예수를 거부함으로 이 명칭을 상실한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2막인 13장이 열리면서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신실한 증인)들이 “자기 사람들”(요 13:1)로 혹은 선교를 위해 ‘세상에 보냄 받은’ 자들(요 17:18; 20:21)로 밝혀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14절은 결정적인 반전이 된다. 앞의 단락에서 세상(요 1:10), 자기 백성(요 1:11), 하나님의 자녀(요 1:12) 등 사용된 3인칭 동사가 1인칭 복수의 목격자 증언 형식으로 변한다.

구약의 역사 가운데 희망의 가능성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사가 이제 그 말씀의 성육신을 현실 세계 안에서 실제 경험한 ‘우리’의 고백을 통해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요 1:14, 16). 이 ‘우리’는 이 전의 영접하지 않은 ‘세상’과는 다른,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요(요1:13) 그리스도를 향한 절정의 예배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한 자들(요 1:14)로 ‘증인’을 의미한다. 이 계시에 대한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는 단순히 목격한다는 의미에서 봄이 아니라, 높은 실재를 환상적으로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포함하여 믿는다는 의미에서의 봄이라 할 수 있다(요 11:40). ‘보는 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영적인 지각, 곧 영생과 믿음을 의미한다(요 6:40). 왜냐하면, 그 뒤에 이어지는 제자들의 말은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증인으로서 고백이요,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다’라는 고백은 1세기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동시대적인 신앙의 영적 통찰력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16:10, 16-17, 19에서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생애와 그 후의 부활(또는 재림)을 보는 것을 가리키며 성령이 언급되어 있는 점을 볼 때, 보는 것이란 성령의 사역을 통한 만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해 예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요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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