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타임캡슐

밀알이야기는 이 신문에 가장 오래된 칼럼입니다. 제가 봉사자로 섬길 때 전임 단장들이 써온 이 칼럼을 읽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따뜻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칼럼을 이어받아 쓰는 것은 밀알 사역 단장직을 이어 받는 것보다 훨씬 부담이 있습니다.

일과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하게 잊혀지지만 글은 사람이 지나간 후에도 아주 오래 남기 때문입니다. 글은 타임 캡슐과 같아서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와 사랑과 느낌과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 저장합니다.

저는 10여년 전에 역사와 후손에 남을 글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무너진 지역교회 재건축 모금에 한국 교회 모금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모금이 잘 되었고 마침내 크라이스트처치의 상징적인 녹스처치가 재건축되었습니다.

타임캡슐을 묻다
머릿돌 밑에 100년후 개봉할 타임캡슐을 묻을때 교회는 제게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타임캡슐에 넣을 편지를 요청해 왔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지진을 겪은 뉴질랜드 장로 교회를 어떻게 후원하고 섬겼는지를 한국말로 또박 또박 눌러쓴 편지와 크리스천라이프 신문과 함께 묻었습니다.

크리스천라이프 신문 밀알이야기에는 밀알의 역사와 사랑과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제게 밀알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이 시대에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또한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번 신문에 타임캡슐을 묻는 것과 같다 여겨집니다.

또한 밀알이야기는 뉴질랜드판 트루먼쇼와 같아서 밀알이야기를 통해 밀알 식구들의 유년기 청소년기 이야기를 세세히 알게 되고 공유하였습니다. “00이가 이번주에는 이런 기특한 일을 했데.. 하나님의 은혜지?” 하며 비록 밀알 모임에는 참여 못해도 오클랜드 시민들이 장애인을 함께 섬기고 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어 왔습니다.

이제까지 밀알이야기는 단순한 한 사람의 장애인을 통한 감동의 이야기를 넘어 뉴질랜드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전 생애를 걸쳐 일어나는 현상을 기록한 질적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이 모두가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 세트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자신 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밀알이야기 Ver. 2
이제 제가 쓰게 될 밀알이야기 Ver. 2는 학교 세트 밖으로 나간 성인 장애인 공동체와 다음 세대 장애인 공동체 이야기들로 글을 풀어 갈까 합니다. 그래서 밀알이야기 Ver.2는 장애를 가지고 자신의 존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장애인의 권리를 존중하여 세트 밖에 나가 자유롭게 사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노출은 가급적 자제하며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개인의 존엄 지키고 인격적 존중을 하며 쓰려다 보니 단어나 이름 하나 쓰는 간단한 내용도 아주 긴 설명으로 써서 전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아무개 라는 명칭과 이름 하나면 이해가 쉬울 말을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라는 아주 긴 설명으로 풀어 쓰게 됩니다.

이렇게 긴 설명의 글을 쓰는 것은 네이밍(단어나 이름에 연상되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피하고, 가능한 있는 그대로를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려는 의도입니다.

밀알 Ver.2 에는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이름이 실명으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글 속에 아무개가 누구냐를 알고 싶은 분은 밀알 모임에 오셔서 있는 모습 그대로 함께 삶을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호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김춘수의 시 ‘꽃’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 나와 너와 우리의 관계가 설정됩니다. 호칭은 밀알 식구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뉴질랜드 밀알 선교단 사역은 올해 30주년이 됩니다. 밀알 장애인 사역은 지난 30년동안 모든 면에서 시나브로 변화해 왔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변화는 호칭의 변화입니다. 밀알 선교단 봉사자들이 밀알 식구들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져 왔습니다.

창간호에 나왔던 그 “아이”는 이제 20년이 지나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더이상 봉사자들이 밀알 식구들을 “우리 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가 되어 갑니다. 상대적으로 봉사자들은 나이가 어려집니다. 때로는 누나 오빠 형이 되었다가 00씨가 되고, 어떤 이는 아가씨 다른 이는 아저씨 아주머니가 되어 갑니다.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요?
얼마 전 하이스쿨 봉사자 한사람이 심각하게 호칭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섬기는 분이 지적으로는 나보다 못하지만 나이로는 우리 엄마와 비슷한데 오빠 언니라고 부르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는 게 맞는지 물어보니 그게 자신도 고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00님”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성인 봉사자들은 00씨라고 부르면 되는데 하이틴 학생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고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르기는 좀 더 어색하다고 말합니다.

듣고 보니 저는 아직 밀알 식구들 보다 나이가 많아 어렵지 않는데 1살 2살 차이에 서열이 중요한 하이틴 학생들에게는 30대 40대 밀알 식구들을 부르는 호칭에 고민이 생기겠다 싶습니다. 창간호에 나오던 그 여자 아이는 이제는 아가씨로 불리지만 곧 아줌마라고 불러야 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식으로 이름을 부르면 참 간단한데 말입니다. 이런 고민을 들으면서 하이틴 봉사자들이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집니다.

이름을 부르는 뉴질랜드 문화에서 살다가 토요일에 장애인을 섬기게 되면서 한국 문화 속에 들어온 1.5세 2세 학생들이 이 호칭의 고민을 통해 장애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생 봉사자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한사람 한사람을 그 나이에 맞게 존중하려는 모습이 이 호칭 고민 속에 고스라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불러야 하냐고요? 밀알 토요학교 봉사자로 오셔서 함께 살면 알게 됩니다. 호칭은 관계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밀알 공동체의 명칭
밀알 공동체를 부르는 명칭도 조금씩 달라져왔습니다. 밀알 어린이, 밀알 학생, 밀알 회원, 밀알 식구 이런 명칭 중에 개인적으로 밀알 식구라는 명칭을 제일 좋아합니다. 밀알 공동체는 시대의 필요에 따라 모임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역할이 조금씩 바뀌어 왔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는 한인 단체가 처음에는 밀알 공동체뿐이었지만 이제는 기능이 다른 기관들이 많이 생겨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다양해져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과 가족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밀알 식구들이 어릴 때는 밀알 식구들의 필요에 따라 모임은 발달 장애인 치료와 인지 언어 치료 교육과 같은 교실 학습 수업 중심의 교육을 우선하게 되었고 밀알 식구들은 ‘학생’이나 ‘아이’로 불렸습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사회로 나아가면서 밀알 공동체 모임은 사회적 교류와 건강과 웰빙 중심의 성인 평생 교육으로 모임의 성격이 바뀌어 왔습니다. 호칭도 ‘00씨’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밀알 공동체는 성인부와 2세대 어린이부의 모임 성격이 달라서 별도의 어린이 부서로 독립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아이 학생 형 오빠 언니 아가씨 아저씨 00씨 님이라는 호칭이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밀알 공동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성격은 신앙 공동체입니다. 언어 교육과 사회적 교류 영적인 나눔 모두 포함하는 전인적인 교제를 나누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중에서 가족과 같은 자연 발생 공동체가 가장 따뜻합니다.

밀알 선교단이 공동체에 초점을 두게 되면서 가족 공동체의 호칭인 형 누나 오빠 언니 아저씨 아가씨 같은 호칭이 쓰여 집니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서 가족 공동체의 따뜻함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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