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선교, 나를 향한 세 가지 질문(마태복음 10:5-15)

해산하는 여인처럼 선교해야 한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산모의 생명을 거는 고통과 위험이 반드시 수반된다. 생명은 생명을 통해서만 태어난다.

하나님은 인류의 생명을 건지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사용하셨다. 궁극적으로 선교는 파괴되고 죽어가는 하나님의 피조물 특히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생명 운동이다. 따라서 선교사 자신의 생명을 투자하지 않고는 선교 현장에서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선교사로서 자신의 수고와 심정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라고 토로했다.

선교사들도 연약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는 한없이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도 많다. 선교를 시작할 즈음에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선배 선교사들이 답답해 보인다. 또한 이렇게 넓은 사역지에서의 열매가 왜 그리 적은가에 대하여 스스로 답답할 때도 있다. 그렇게 사역하다가 조금씩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선배 선교사가 위대해 보이기 시작하고, 그들의 삶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신의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선교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요, 오히려 마라톤과 같은 장기전이다. 선교사는 전도하는 자가 오히려 아니요, 전도하는 삶을 보여주는 사람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선교지에서 진실하게,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는 그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무엇을 주고 있는가?
9-10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이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해야 한다. 특히 이 첫 번째 질문은 선교의 본질을 호도하기 쉽다. 선교지를 선택할 때,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무엇인가 부족함이 많은 곳을 택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아직 복음을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은 지역을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는 우월 문화권을 가지고, 우월 경제권을 가지고 그리고 우월 축복권을 가지고 선교지에 가기가 쉽다. 그래서 은연중에 ‘권위 의식’을 가지기가 쉽다.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물질도, 믿음도, 문화도, 지식도, 의식도 온전히 ‘주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는 그러므로 그들의 어려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후원 교회를 동분서주하면서 뛰어야 한다.


선교사는 또한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열심히 그들에게 찾아가 주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선교 자세는 통상 실패한다는 것을 선교 역사가 증명한다. ‘주고 있는 것’에 스스로 만족해하고, 주고자 할 때에 받고자 하는 경우가 많아질 때 선교적 성공을 이룬 것으로 생각할 때에 문제가 생긴다.

선교는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며, 삶을 나누는 것이다.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선교지의 진정한 필요성에 대하여 같이 애쓰며, 수고하는 것이 오히려 선교적 성공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질문은 언제나 선교사의 마음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나는 무엇을 받고 있는가?
8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 질문은 선교사를 영적으로 둔화시킴을 방지하기에 매우 중요하다. 선교사가 선교 후원금을 파송교회나 후원교회, 혹은 성도들로부터 받는다. 당연하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이 질문의 내용은 그 사항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사가 선교하면서 받는 대우 문제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 종종 선교사에게 돌아갈 때가 많다는 질문이다.

솔직하게 따지자면, 사실상 선교사들이 엄청난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비단 물질적인 것뿐 아니요, 영광과 칭찬과 존경과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을 받아서 누린다. 물론 선교사들은 반드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오해할 것은 아니다. 단지 주님이 받으셔야 할 것을 내가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영적으로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선교사이기 때문에 받는 영광과 대우, 선교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정해 주는 수고, 선교사이기 때문에 스스로 가지는 우월감 등의 문제에 대하여 언제나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선교사의 영은 늘 풍성한 주님의 은혜로 넘치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5-6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이 질문을 심각하게 해 볼 필요가 있다. 선교지에서 만나는 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종종 불쌍한 영혼이라고 말하곤 한다. 선교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보라고 외치곤 한다. 이 생각이 인간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은지?

선교사는 ‘하나님이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 그 영혼’을 보아야 한다. 선교사의 눈에 보이는 그저 불쌍한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영혼을 보아야 한다. 문화적으로 낙후된 현실들, 경제적으로 피폐한 사회들, 위생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시설로만 보면서 그 불쌍한 현실을 보고 있다면 곤란할 수 있다.

선교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영혼에 대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나라의 현실도 중요하고 선교적 환경도 중요하다. 그 사람들의 여러 가지 성품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현실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지금 당장 주어야 한다는 조바심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사랑하는 잃어버린 그 영혼’이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영성을 관리해야 한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성숙한 선교사는 잘 알 것이다. 교회와 후원자는 이 문제를 두고 같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선교사들이 말하는 ‘성공’이라 할 수 있는 경우가 혹시 세속적 성공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선교지에서 현지인을 보면서 그 많은 영혼이 불쌍하게 보일 때, 무엇 때문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어려운 형편을 보면서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일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선교를 통해서 단순히 사회봉사, 구제보다 그 이상을 원하신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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