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거위의 꿈

유학의 시작
뉴질랜드에 이민과 유학을 온 사람들에게 왜 뉴질랜드에 유학과 이민을 왔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자녀 교육과 복지혜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뉴질랜드의 공교육과 의료 보건 분야를 포함한 복지제도는 물론 자연환경과 안전한 나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큰 딸은 돌 지나고 뉴질랜드에 왔고 둘째는 뉴질랜드 노스쇼어 병원에서 태어나 어찌 보면 진정한 이민 2세로 한국 문화를 거의 알지 못하고 자랐다. 물론 교민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 다니던 교회는 매주 토요일 현지 고등학교 교실을 빌려서 한글학교를 운영하며 한국 사람은 꼭 한글을 알아야 한다면서 자녀들의 한글 교육과 교회학교 사역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렇게 우리의 자녀들은 교민 교회 중심으로 유학과 이민 생활을 하면서 주중에는 현지 학교를 다니며 백인 한국인 가리지 않고 친구를 사귀고 같이 어울렸다. 그야말로 Island Girl이요 Kiwi Girl이었다.

그러다가 주일학교 때 의사가 되겠다는 소명을 받고 한 번도 그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꿈만 컸지 노력은 못 따라가는 것 같아 내심 그러다가 말겠지 했으나 학년이 거듭될수록 의사 외에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면 부모로서 해줄 일은 뭔가 생각했고 아내와 같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기로 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께 큰 딸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달라고 또 환경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던 하나님은 드디어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매사에 간섭하시는 주님
그때 뉴질랜드는 유학과 이민 러시였고 교민 교회 중 우리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이 되면서 한 달이 멀다 하고 전 세계에서 많은 분들이 와서 부흥회나 신안 간증 집회를 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목사님들을 대접하거나 의전 봉사를 하며 자연스레 우리 가족이 같이 인사를 드리거나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두 딸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같이 만나면 그때마다 강사들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으니?” 하고 물어보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가 되겠다고 당차게 이야기했다. 강사들은 당연히 의사가 되게 해달라는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수진이의 순수하고 소중한 꿈이 그 많은 목사님과 강사님들을 우리에게 인도하셨고 친히 기도하게 해주었고 그 결과 지금은 꿈대로 소아과 전문의로서 소명을 감당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마이랑이 초등학교, 머레이스베이 중학교, 랑기토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같이 입시학원을 운영하기로 한 후배가 이민법이 바뀌어 갑자기 못 오게 되어 내가 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 당시 신흥 오클랜드국제고등학교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내심 마지막 고등학교 3년 과정은 좀 공부를 하는 사립학교라도 보내야 의대 진학이 현실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어찌 보면 대학 진학 결과도 아예 없고 유학생 중심의 국제학교인지라 모험이었지만 과감히 전학을 가서 마지막 3년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뉴질랜드 최초의 국제학교로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전 세계에서 우수한 교사들을 초빙하고 최고 학생들을 전액 장학금을 주고 선발하여 왔기에 면학 분위기도 아주 좋았고 큰 딸은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그 당시 원서 작성 시 교사 추천서를 제출하여야 했는데 지금 봐도 그런 추천서를 받은 학생은 어느 누가 봐도 선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감탄할 만한 추천서를 써 주었다.


이렇게 어린 소녀가 가졌던 거위의 꿈은 기도로 이어져 전 세계 각지에서 많은 믿음의 어른들이 와서 직접 안수하고 기도해 주었고 고등학교 환경까지 바꾸어 가며 공부하게 하는 등 매사에 간섭하시며 꿈을 이루게 만들어 가시는 것을 볼 때 주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유학생 부모의 애환
이렇게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트렁크와 캐리어를 들고 한국으로 역 유학길 오르는 딸을 공항에서 배웅하면서 우리들 자녀의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당시만 해도 교민 자녀들이 한국의 대학으로 역유학 가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소아과 의사가 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의과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보내기는 했지만 사실 맘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수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우리이기에 뉴질랜드에서 밤샘 공부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딸이 과연 공부를 해내고 학년을 올라갈 수 있을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늘 부모와 같이 살면서 음식과 모든 것을 제공받으며 자기 방과 공간을 갖고 지내다가 학교 기숙사에서 홀로서기로 자급자족해야 하고 타인과 같이 공동생활을 하는데 뉴질랜드 마오리(서울대에서 딸의 애칭)가 과연 한국에 가서 견뎌낼까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잘 해낼 거라고 무한 신뢰를 딸에게 보내면서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이렇게 우리 가정은 20년 가까이 함께 살다가 딸 하나, 딸 둘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카톡이나 SNS 등등 다양한 통신 방법이 있고 데이터 통신의 발달로 영상통화도 자유롭지만 2010년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전화나 전화카드로 음성 통화가 대부분이었고 카카오톡도 시작 무렵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영상 베이스의 통신은 없었다.


따라서 매일 딸의 하루하루가 궁금했고 언제 유학 포기하고 돌아온다고 할지 노심초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 대학강의는 어떻게 들을 것이며 그 수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버텨낼 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수진이를 위한 나의 기도는 그때부터 진짜로 시작되었다.

아빠이지만 때로는 상담 역으로, 때로는 리포트 첨삭 선생님 역으로 물심양면 서포트하며 가장 중심에는 기도 노트에 수진이의 기도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적고 응답 또는 결론이 날 때까지 기도했다. 감사하게도 아내의 지인들이 자발적으로 중보기도 팀을 만들어서 늘 기도해 주셨다.


기도 제목은 우선 과목별 시험 패스 또는 좋은 점수 얻도록, 기숙사를 매 학기마다 신청하는데 꼭 기숙사 배정받을 수 있도록, 심지어는 지도교수 배정과 면담까지 그야말로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도했고, 아마도 그 당시 나의 기도 6년은 큰딸의 의과대학 6년의 기도 제목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딸이 의과대학을 다니는 기간 동안 나는 유학원을 운영하다가 더불어 직장도 다녔는데 일 년에 최소 2회 이상 한국에 출장을 다녀오는 업무였기에 출장과 휴가를 활용하여 자주 딸을 만나고 격려하여 주고 기도해 주는 기회를 늘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 학년, 매 학기, 매달, 매주 그리고 매일 주권자 주님의 간섭 하에 주도적으로 6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실 딸과 나와의 신뢰는 대학을 가서 더 좋아졌다. 딸은 모든 분야에서 어려울 때마다 우리에게 SOS를 쳤고 우리는 그때마다 첫째 기도 먼저하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고 했고 대부분은 기도 가운데 응답이 오고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기도는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생기고 심지어는 시집을 간 지금까지도 기도 제목을 같이 나누며 모든 것을 다 공유하고 있다.

타협해서는 안 되는 원칙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일성수’.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 바쁜 일정 가운데도 주일성수를 하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했다는 일화를 나누며 한국대학 생활을 하면서 절대 타협하지도 말고 예외도 없이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하루의 안식을 취하는 것을 꼭 지키자고 했고 그 습관을 지금까지도 잘 지켜 결혼해서 신랑과 함께 주일 예배하러 오는 모습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작은 소녀의 꿈과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시고 때마다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셔서 기도 받게 하여 주시고 또 도움이 필요할 때 돕는 손길을 보내주셔서 ‘거위의 꿈’을 이루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부모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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