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책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성경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자 베스트셀러이다. 놀랍게도 그 성경 다음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바꿔놓는데 이바지한 책이라며 1991년에 북오브더먼스 클럽과 미국 국회도서관 공동으로 조사했는데 그 책이 바로 하퍼 리(Harper Lee)의 『앵무새 죽이기』이다. 196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편견’을 다룬다.
이 소설은 인간의 편견이 세상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고발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미국 남부의 한 작은 마을이고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내면을 그린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이들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을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얼마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목회했던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목사님의 자녀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앵무새 죽이기』 이 책이 필독 독서 과제였다고 한다.
필자가 이 소설을 읽어보니 왜 이 책이 필독 독서여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다. 그처럼 인종차별로 비극적인 역사를 안고 사는 나라라면 이 책은 그 다음세대들에게 역사와 삶을 돌아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앵무새는 누구이고, 왜 앵무새를 죽이지 말아야 하는가?
‘앵무새’는 무슨 의미일까?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는 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고 말할까? “다른 새들과 달리 앵무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먹거나 창고에 둥지를 트는 등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새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 주인공의 이웃집 사람인 부 래들리나 재판에 넘겨진 흑인 톰 로빈슨은 앵무새와 같은 인간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편견만으로 고통을 받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 당시 백인들은 무해한 흑인도 서슴없이 죽였다. 심지어 흑인을 죽게 만든 자들은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백인들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정말로 공평한지?’, ‘하나님의 정의가 과연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배심원들은 피고가 무죄이지만 흑인이라서 유죄를 선택했다
흑인 톰 로빈슨이 백인의 딸을 폭행했다는 의심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배심원들이 피고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죄를 선택해서 사형을 당하게 했다. 스카웃의 아버지는 이 흑인을 변호하며 배심원들에게 피고가 죄가 없음을 논리적으로 잘 설득했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배심원들의 편견은 높은 장벽이었고 결국 피고는 사형을 당했다.
“이 흑인을 고소한 사람들처럼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흰 피부밖에 없는 백인들에게 흑인은 자신들의 울분과 분노를 터뜨리는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 … 몇몇 백인을 빼놓고서는 남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다.”
대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면 다 옳은 일인가? 흑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모든 배심원이 판결한다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가? 편견 없는 세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너와 내’가 성장하여 성숙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 나이가 들면 나잇 값을 해야 한다. 결국 자신의 편견을 깨야 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성장을 다룬다
이 소설의 특징은 주인공 여자아이 ‘스카웃’이 7살부터 9살까지 약 3년 동안 어린아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하는 말과 삶을 보고 또 인종차별을 지켜보며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스카웃은 이렇게 말한다.
“집을 향해 가는 동안 나는 나이가 부쩍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집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오빠랑 내가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대수(수학의 한 영역 algebra)를 빼놓고는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별로 많은 것 같지가 않았다.”
여기에서 나이란 ‘정신적 연령’을 가리킨다. 스카웃은 학교 교실에서 배운 것보다 삶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아버지가 흑인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흑인을 배려하는 모습’,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만으로 백인들로부터 심한 질타와 모욕을 받으면서도 이들에게 관용과 사랑을 베푸는 모습을 보며 배운다.
주인공이 성장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하기
스카웃이 성장한 모습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래들리 집 현관에서 버티고 서서 자기의 집과 이웃을 바라다본다. 그전에는 항상 자신의 집에서만 래들리 집을 바라보았었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로 바라본다.
스카웃은 “아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한다.
“스카웃은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카웃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래들리는 바로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는 자기만의 편견이란 세상에 갇히지 않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성장’이란 ‘역지사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 그릇이 커질뿐더러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사람들을 대할 때 너그러워진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편견을 철저히 깨뜨리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을 찾아가셨다. ‘사마리아라는 장벽’과 ‘여성이라는 장벽’은 그 당시에 결코 쉽게 넘어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장벽을 동시에 갖고 있는 한 여인에게 다가가시며 그 큰 장벽들을 뚫고 가신다. 예수님은 모든 장벽을 허무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인간에게는 장벽이 수없이 많다. 경제적인 장벽, 인종적인 장벽, 신분적인 장벽 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복음이신 예수님이 들어간 곳에서는, 교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또 성도가 살아가는 곳에서는 이 장벽들이 무너져야 한다. 특히 우리가 스스로 성장하여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그 편견을 철저하게 깨뜨려야 한다. 그것이 성장하는 모습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