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기적의 종교
기독교는 기적으로 시작해서 기적으로 마치는 종교이다. 성경이 시작되는 천지창조로부터 마지막인 계시록에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재림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펼쳐질 일들. 사전적 의미로 인간의 삶의 상식에서 벌어질 수 없는 초자연적 신적 영역의 현상인 범주가 기적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기독교는 신적 존재이신 예수께서 직접 창조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구속적 일들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므로 기독교 기적은 구속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기독교의 기적을 크게 5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동정녀 탄생 2. 대속적 고난(십자가 죽음) 3. 부활 4. 승천 5. 재림이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의아한 기적은 대속적 고난이다. 기적하면 뭔가 극적 반전이라든지 아니면 인간 상식 밖에서 놀라운 일들이어야 하는데 한 연약한 인간이 죄를 짊어지고 고난받다가 억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결국 죽는 것을 우리는 굳이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의 5대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이 대속적 고난이다.
대속적 고난이 가장 큰 기적인 이유
첫째, 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예언 가운데 나머지 4가지의 기적들에 대한 내용을 모두 합친 것보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심에 관한 예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이다.
둘째, 4가지의 사건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대속적 고난(십자가 죽음)은 신적 능력을 버리고 나약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인 영혼을 살리는 어마어마한 기적 중의 기적인 것이다. 재언하면, 연약한 육체로 영원한 생명인 영혼을 구원하는 기적인 셈이다.
셋째, 네 가지의 기적들은 모두 단번에 일어난 일들이지만, 대속적 고난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온전한 순종과 복종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다. 성경대로 죽기까지 복종하셨느니라. 물론 신적 영역에서 볼 때,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있지 않기에 같은 시각일 수 있으나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공간)을 입고 오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시간) 당하셨으니(요 19:30 “다 이루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기적이고, 가장 위대한 기적 중에 기적인 것이다. 기독교다움의 끝판 왕인 것이다.
기적의 오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때로는 도깨비방망이로 여길 때가 많다. 믿음이 좋아서, 기도만 하면 우리의 어려운 문제들이 순식간에 해결되어지고, 사라지는…고전 12장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예언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 등등을 은사로 말씀하고 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시면 나타나는 능력들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똑같이 다 주신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해 각 사람에게 은사를 따라 다르게 주셨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반면에 대속적 고난이 가장 큰 기적인데, 이러한 것은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골로새서 1:24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몸이요, 우리는 그의 지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믿음 때문에 겪는 고난과 어려움을 주님도 함께 고난 당하신다는 의미이다.
가장 큰 은사
고린도전서 12장에서 9가지 성령의 은사를 말씀하신 후 끝부분에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다. 13장에 소개된 단 한 가지의 은사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무려 15가지로 펼쳐 놓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만큼 9가지 은사보다도 더 중요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 안에서 영원한 생명인 영혼을 얻는다는 것은 오로지 사랑만큼 더 큰 능력과 기적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야 말로 영혼을 살리기 위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는가? 천사의 말(방언)을 할지라도, 귀신을 쫓아내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영혼도, 생명도 살릴 수 없다.
능력을 행하는 은사들을 행할지라도 결국엔 갈라디아서 5:23~23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나야 가능하다. 열매란 결과를 말한다.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매우 힘든 일이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 10:45).
삶을 감당하고 죽어야만 나타나는 기적
요즘 왜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손가락질 받고 있는가? 그것은 기적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의 능력들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독교의 기적들을(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알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희생적인 삶과 멀어져 있는 것을 알기에…’너희들은 크리스천이 아니냐?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니더냐? 그런데 왜 우리와 같냐?’이다 오히려 우리보다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법과 규칙과 도덕의 잣대가 있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우월하고 고급한 은혜의 법, 십자가의 헌신적 사랑이 있는데 그것이 없으면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생애의 삶 속에서 만들어낸 기적이야말로 가장 기독교다운 모습이다.
요즘 크리스천의 삶은 주어진 환경적 삶 속에서 기적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오래 참아야 하고, 성내지 않아야 하고, 내 생애 전부를 드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적은 뭔가 단번에 쨔자잔 하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기적은 죽어야 일어난다. 다시 사는 것, 높이 승천하는 것, 영광으로 재림하는 것 등등은 죽지 않으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인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너무 초자연적, 순간적인 변화만을 삶에서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 속에서 힘겹지만 묵묵히 감내하시기를 원하신다. 비록 무겁고, 때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상황일지라도 그것이 왜 가장 초자연적이냐면 우리의 주어진 연약한 육체적 삶으로 모든 죽은 영혼들을 다시 살리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기적은 오직 유일하게 온전히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인내하고, 감내해야만 일어나는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