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브레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팝콘 브레인은 미국 워싱턴대학교 데이비드 레비(David Levy) 교수가 만든 신조어로 옥수수가 터져 팝콘이 되듯 아주 강렬하고 즉각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는 뇌의 변형을 일컫는 말입니다. 요즘 세대들의 반응이 옥수수 알갱이가 ‘톡톡’ 튀는 모습과 유사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력한 자극이 인간의 뇌를 변형시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고 이성적 판단을 하게 만드는 전두엽을 변형시킵니다. 전두엽은 뇌의 최고 경영자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최근 많은 사람이 유튜브나 SNS에 열광합니다. 요즈음은 영상 중에서도 긴 영상보다는 간편하게 볼 수 있는 ‘쇼츠(shorts)’나 ‘짤’ 등 짧은 영상이 더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몇 부작의 드라마나 한두 시간 분량의 영화도 편집해서 짧은 시간 안에 볼 수 있도록 만듭니다. 굳이 전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긴 시간을 들여가면서(?)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연세대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청소년들이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유튜브 앱을 켜 짧은 영상들을 보다 보면 숙면을 방해해 신체 발달에 악영향을 주거나 피로감이 커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직 신체 기관 특히 뇌가 다 발달하지 않은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환경적 노출이 바람직할 리 없습니다.
또한, “이용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알고리즘에 따라 자극적인 영상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이 같은 영상에 오랜 시간 노출되다 보면 자기통제를 할 수 없게 되어 무력감을 느끼거나 대인 간 커뮤니케이션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이동귀 교수는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성인보다 통제력이 약한 청소년일수록 부작용이 더 크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팝콘 브레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장 10절~11절)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들에게 경고하시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자녀들은 잠자는 것뿐 아니라 깨어있는 시간도 문제가 됩니다. 큰 모니터 화면 앞이 아닌 자신의 손안에 들어있는 화면을 통해 보고 싶은 영상, 하고 싶은 게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잘 시간을 놓쳐버리는 것이 일상이고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또한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크기가 작다 보니 부모의 눈을 피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국의 여성가족부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는 매년 청소년들의 삶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변화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청소년 통계」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2023년에 발표한「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10대(10~19세) 청소년 10명 중 4명(40.1%) 이상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며, 이는 전년 대비 3.1%가 증가한 수치라고 합니다. 10명 중 4명이 과의존 위험군으로 분류되고 이 수치도 매년 증가하고 있으니 심각성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시기에 최근 기독교인들에게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파리올림픽입니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이번 파리올림픽은 혁신적이고 독창적이며 전 세계인들을 공평한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그들만의 방식이 많은 사람에게 큰 기대감을 주었습니다.
파리의 역사와 세느강의 아름다움을 통해 스포츠와 문화의 융합을 선보이려는 다양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세느강변을 따라 선수들이 행진하고, 여느 개막식과는 달리 도시 전체를 무대로 파리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개막식이었습니다.
또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선수들의 음식도 제한을 두었고 에어컨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곳곳에서 불평이 이어졌지만, 그 취지는 매우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평등을 캐치프레이즈로 하여 선수 및 자원봉사자의 남녀비율까지도 같게 구성할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이러한 파리올림픽의 표어는 ‘완전한 개방과 포용’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가 어떤 문화를 형성하며 어떠한 사회인지 알고 있기에 기독교인들에게 ‘완전한 개방과 포용’이라는 문구는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또한, 개막식은 여러 모양으로 큰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가장 비난이 집중된 장면은 개막식 중반부에 등장한 ‘최후의 만찬’ 패러디와 프랑스 가수 필리프 카트린느의 술과 욕망의 신 디오니소스를 패러디한 부분 등이었습니다.
다음은 파리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7월28일 한국일보의 기사입니다.
“파리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인간 사이 폭력의 부조리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라 설명했지만, 종교계는 즉각 반발했다. 프랑스 특유의 풍자와 해학을 감안하더라도 종교적 감수성을 지나치게 무시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주교회는 개막식 당일 낸 성명에서 “기독교를 조롱하는 장면이 담긴 개막식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며 날을 세웠고, 독일 주교회도 퀴어(성 소수자) 성찬식은 최악의 장면이고, 완전히 불필요했다고 비판했다.”
참으로 헷갈리는 세상입니다. 둘러보면 ‘이상하게 흘러간다’ 싶은 것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팝콘 브레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는 정말 좋은 자극적 요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더없이 신나고 행복한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진리임을 고백하는 우리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눈물과 안타까움이 세상 곳곳에 장맛비처럼 흘러넘치는 것이 느껴집니다.
얼마 전 미국 남부의 내슈빌(Nashville)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은 미국 컨트리 음악의 본고장입니다. 감사하게도 오프리(Opry)라는 공연장에서 컨트리 음악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 이래서 아직 미국이 건재하구나!’ 하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바로 그 큰 공연장에 컨트리 음악 가수들과 찬양사역자들이 함께 공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행자가 앞으로는 찬양 가수들과 함께 더 많은 공연을 할 계획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세상 어느 한쪽에서는 기독교 정체성의 혼란을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어느 한쪽에서는 여전히 그 정신을 이어받아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팝콘 브레인을 만들 정도로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에 반응하는 세상, 우리의 정체성을 단숨에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세상,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무너져가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하며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장 1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