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그리움

몸부림은 그리움을 향한 육신의 몸짓
그리움은 영원을 향한 영혼의 몸부림

몸부림쳐도 몸부림쳐도
내 두 발은 땅을 떠날 수 없어 슬프고
그리워해도 그리워해도
내 영혼은 육신을 떠날 수 없어 슬프다

그리움은 알고 있다
육신의 한계
영혼의 한계
그리하여
모든 그리움은 슬픔으로 바뀐다

오늘도 나는 그리움을 앓고 있다

나는 그대처럼 내려가야만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산으로 들어갔다가 10년 뒤 태양을 보고 외쳤다.
“나는 그대처럼 내려가야만 한다!”

그는 최고점에 달했기에 내려오고자 했을까? 10년의 정신세계 탐구 뒤에 그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친 붓다와 같은 경지에 그가 올랐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니 그건 오히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내려오기로 결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보라 나는 지나치게 많은 꿀을 모아 놓은 꿀벌처럼 나의 지혜에 지치고 말았다. 이제 나에게는 지혜를 얻기 위해 내미는 손이 필요하다. 나는 선물하고 싶고, 나누어 주고 싶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내려옴을 산 아래 사람들은 몰락이라고 부를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내려오기를 원했다. 내려와서 다시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짜라투스트라의 위대함이었다.

나는 일흔 살이 넘었다. 그런데도 아직 올라가기만을 원하고 있다. 있는 자리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더더 높이 오르기를 원하고 있다. 물론 이 오름은 어떤 물질이나 지위에 관한 것은 아니다.


나의 오름은 순전히 앎 혹은 진리에 관한 것이다. 내가 모자라고 너무도 어리석기에 그 빈 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에 수많은 책을 뒤적이고 명상에 잠기며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고 있다.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깨닫는 날에는 아니 어스름한 형체라도 보는 날에는 그만 내려가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지만 아직도 아무것도 깨닫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으니 흘러가는 시간과 더불어 애만 더 탈 따름이다.

예수는 서른 살에 광야로 나가 40일 금식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와 가르치심을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나오신 분이니 감히 예수의 흉내를 낼 수는 없어도 서른 살에 산에 들어갔다가 10년 뒤에 세상으로 내려온 짜라투스트라의 흉내는 내볼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칠십을 넘긴 이 보통의 사내의 바람이요 한이다.

그리움이라는 마음자리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마음자리는 바로 그리움이었다. 흔히 그리움이라면 고향에 대한 향수, 떨어져 있는 가족과 친구에 대한 보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애틋한 마음 등등을 표현하는 말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요즈음 나에게 있어서의 그리움은 보다 더 시원(始原)을 찾아 올라가는 의미의 언어가 되었다.

내게 있어 그리움은 결코 남녀 간의 상사(想思)나 사물이나 사람 혹은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연민(憐憫) 정도를 뜻하는 일상의 평범한 언어가 아니었다. 그리움은 내게 ‘영원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볼 때 그 모든 방황은 사실은 영원을 알기 원한 영원을 찾기 위한 도정이었다.

철모르던 사춘기 시절의 반항도 짝을 찾아 헤매던 젊은 시절의 사랑도 진리를 찾아 책 속에 파묻히던 그 오랜 시간의 방황도 사실은 모두가 ‘영원을 향한 몸부림’이었고 그것은 내 존재를 언제나 꽉 채우고 있는 그리움이었다.

오늘도 내 가슴 속에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향해 흘러 나간다. 사람, 나무와 꽃, 하늘의 구름, 바다의 푸른 물결, 아아 아무리 둘러보아도 영원한 것은 없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을 향해 내 그리움은 짙은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나는 그 모든 것의 필멸(必滅)을, 그리고 그 속의 일부에 불과한 나 스스로의 필멸을 슬퍼한다. 시간이 지나며 그 슬픔은 가슴속에 켜켜이 쌓이면서 그리움으로 바뀌어 간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장 11절)”라고 말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에 우리는 철들면서부터 평생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나가다 나이 들수록 그 사모하는 마음이 그리움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그리움을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며 승화시키는가에 따라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고 나는 또 생각한다.

필멸의 육신은 아무리 공을 들여도 결국은 병들고 노쇠하여 스러지고 만다. 많은 사람이 그 육신을 붙잡고 별별 짓을 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안타까운 몸짓에 불과하다. 붙잡아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고 영혼이다. 마음과 영혼 속에서 그리움을 승화시키다가 때가 되면 그 그리움마저 놓아주어야 할 것이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다면 그 또한 한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욕심일 것이다.

세상으로 내려오다
붓다는 35살에 깨달음을 얻고 세상에 나와 80세에 입멸할 때까지 사람들 사이를 편력하며 깨달음을 나누었다. 29살의 나이에 왕궁을 나와 깨달음을 향해 정진한 동기는 역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왕궁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로병사를 보고 느낀 슬픔이 그리움으로 바뀌었을 때 그는 왕궁을 떠나 깨달음을 향한 방황을 시작했었다.

35살에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세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도 단지 평범한 수도사의 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세상으로 내려왔기에 그의 그리움은 자비심으로 승화하였고 그에게 다가가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하늘 높은 보좌에 앉아 있어도 될 예수가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온 것도 자기와 같은 형상을 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먼저 보내어 천국 복음을 전해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그리움이 되고 그 그리움이 사랑으로 승화하여 그는 드디어 땅으로 내려와 30세가 되자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사랑을 전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손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므로 사람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그는 본디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셨다고 성경은 말한다(빌립보서 2장). 아무리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라도 세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세상의 수많은 신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결코 붓다가 될 수 없기에, 예수는 더더욱 될 수가 없기에, 오늘도 영원을 사모하는 내 마음은 더욱 커지기만 하고 그리움은 가슴 속에 사무친다. 그리고 앰한 짜라투스트라만 입속에서 중얼거린다.

“당신이 외쳤던 초인(超人)은 그리움을 극복했소? 신(神)은 죽었다고 외친 당신이니 그리움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리움의 느낌만은 극복하지 않았겠소? 내게 가르쳐주오. 그럼 나도 그만 올라감을 중단하고 당신처럼 내려가겠소. 여하튼 난 당신을 좋아하오. 다른 건 몰라도 내려가기로 결심한 그 당신의 마음자리만은 본받고 싶기 때문이오. 내려가서 나도 그냥 사람들 속에 섞여 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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