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묵상의 도움을 주는 ‘틀’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서 묵상하는 것이다. 큐티가 처음 한국 교회에 소개되었을 때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성경을 신학 전공자자가 아닌 일반 성도들이 읽고 묵상하다가 잘못된 해석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였다. 대부분의 이단이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시작한 점을 생각해 보면 우려할만한 일이기도 했다.

큐티는 대단히 주관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안전하게 묵상할 수 있는 울타리를 쳐주어야 한다. 이를 ‘묵상의 틀’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몇 번에 걸쳐 소개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필자가 인도하던 성경공부 그룹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권사 한 분이 자신은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하면서,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여서 그의 믿음을 점검하는 질문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구원의 확신도 없고, 천국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권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다니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내 삶에서 경험한 사건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원망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항상 공의롭고 선하시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틀리지 않는다. 내가 틀렸다. 내 생각이 짧고 내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 묵상의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큐티는 위험한 길로 접어든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질그릇이라고 한다(이사야 45:9). 토기장이 이신 하나님께서 진흙 한 덩이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를 결정하신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라고 고백한다. 어리석은 양이 목자를 향해 왜 이런 길로 인도하느냐고, 당신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믿음에는 ‘왜’가 없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왜 나를?’이라고 소리칠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의롭다는 것은 똑바르고 옳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굽은 분이 아니시다. 사람의 팔은 안으로 굽지만, 하나님의 팔은 안으로도 굽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마치 진흙 같은 우리가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께 왜 나를 이 따위로 만들었냐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진흙은 잘게 부서져 고운 가루가 되기만 하면 된다. 고운가루가 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우릴 빚어내지 못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잘게 빻아져 고운가루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우린 흙 수저를 싫어한다. 금 수저가 되고 싶어 한다. 진흙은 싫고 금이나 은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 흙은 잘게 부수어 물에 넣고 이겨내면 되는데, 은금은 용광로에 넣어야 한다. 뜨거운 불에 녹아내리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다. 용광로 같은 고난을 당해도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마음으로 그 분이 빚어 주시는 그 모습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좋겠다. 내가 누군가와 똑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손수 하나씩 빚어낸 작품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을 똑 같아야 되지만 작품은 하나하나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주제가가 ‘왜’ ‘왜’ ‘왜’이다. 꽤 고상하게 표현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이 항상 옳으심을 인정하고 내게 가장 좋은 것 주심을 감사할 때, 원망과 불평이 사라진다. 그래야만 나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전적 위탁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지속적으로 교제하며 동행할 때, 그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알게 된다. 이해되지 않고 힘든 시간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옳으심을 믿기에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다’를 틀로 삼고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100% 죄인이다
두 번째 묵상의 틀은 ‘인간은 100% 죄인’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과 6장에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한다.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 모두는 나면서부터 죄인이다.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욕심은 죄의 경향성이다.


위대한 종교개혁 신학자인 칼뱅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가장 중요한 교리에 포함시켰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100% 죄인이다. 큐티는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는 것이다. 큐티는 말씀의 거울을 통해 내 죄를 보는 것이다.

큐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묵상하고 있으면 안 된다. 사울의 죄가 내 죄이고, 다윗의 허물이 나의 허물이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반복된 배신의 역사는 나의 배신의 이야기로 묵상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로마서 5:20)라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기의 허물이 더 많이 보이지 않을까? 말씀 묵상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죄를 더 많이 보지 않을까? 허물에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시편 32:1)이 누리게 될 은혜를 생각해 보면 바울의 고백이 이해가 된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그 분이 흘리신 보혈로 내 죄를 사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칠 수밖에 없다.

의인은 회개한 죄인이다
‘인간은 죄인이다’는 아주 간단한 믿음의 틀이 없기에 자기의 공로와 의에 사로잡혀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언제나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하는 생각이 점점 발전(?)하면 급기야 하나님보다 자기가 옳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첫머리에 언급한 권사처럼 “그건 하나님이 틀렸어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는 표정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썼다. 평생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몸 바친 바울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했다면 우리는 어떤가? 죄인인가, 의인인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회개한 죄인’과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있을 뿐이다. 회개한 죄인을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인쳐 주신다. ‘칭의’는 내가 의로운 인간이기 불러주는 호칭이 아니다. 죄인인데 누군가 내 죄 값을 지불해 주었기에 ‘무죄’라고 칭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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