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사도행전 13장 1절-3절)
저는 오늘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안디옥교회는 사울이 주도한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기점으로 시작된 박해 때문에 피난 간 유대인들과 구브로, 구레네의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설립된 교회입니다. 요즘의 표현으로 하자면 ‘다민족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가 아니라 이 피난 교회로 하여금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안디옥교회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하는 열린 마음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안디옥교회가 단지 그런 구조적인 장점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이 안디옥교회는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성도들이 서로를 용납하는 ‘화평’을 이루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건물이나 시설이나 재정보다 사람이 더 큰 재산이 됩니다. 물론 건물이나 재정이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큰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는 교회의 본질보다 외적인 것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안디옥교회의 ‘사람들’에 주목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바나바’가 소개됩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간 피난민들이 안디옥에 가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전도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기는 했는데 그들에게는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합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후에 정말 파격적인 일을 벌이는데, 그것은 자기 고향 다소에 은둔해 있던 사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목회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교회 교인의 태반은 사울 때문에 피난을 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울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교인들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연결해 줄 정도로 바나바는 온유하고 영적으로 권위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데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있습니다. ‘니게르’라는 뜻은 ‘검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볼 때 시므온은 흑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노아가 술을 마시고 하체가 노출된 채로 잠이 들어 있었는데 그의 아들 가운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었지만, 함은 오히려 아버지 노아의 수치를 확산시킴으로 인해 저주를 받게 되었고, 그 후손인 흑인들이 저주를 받아 대대로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흑인 저주론이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잘못된 주장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 사이에 그런 생각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 교회의 선지자요 교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안디옥교회가 사울을 용납한 것 이상으로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이어서 ‘구레네 사람 루기오’도 소개되었는데,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루기오는 시므온과 함께 북부 아프리카로부터 온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나엔’은 헤롯의 젖동생이라고 했으니, 당시 왕이었던 헤롯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왕족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도 바울의 전 이름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위대한 사도이지만, 당시 안디옥교회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자신과 가족들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안디옥교회의 리더들 가운데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기반이 얼마나 불완전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신앙생활 하며, “저 사울은 우리를 박해하던 사람이다. 어떻게 그런 자가 우리 목회자가 될 수 있어?”, “어떻게 저주받은 흑인이 우리의 리더가 될 수 있어?”, “헤롯의 젖동생이라고? 헤롯이 얼마나 우리를 못살게 굴었는지 알아?” 이런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그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화평’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많은 사역을 감당할지라도 그 가운데 화평이 깨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열악한 조건 가운데에서도 화평을 지킬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유능한 일꾼들을 세울 수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를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는 큰 은혜와 사명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는 일치를 생명으로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다양한 성품을 주셨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다양한 생각을 가져야 오히려 건강합니다. 단 전제가 있습니다. 그 다양성이 ‘화평’이라는 매개체로 조화를 이룰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일치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본토 출신과 섬사람들이 한 마음이었고, 유대인과 헬라인이 한 마음이었으며, 귀족 출신과 평민 출신이 한 마음이었고, 그가 어느 인종인가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높이고 존경하며, 감싸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정말로 힘듭니다. 사탄은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좋은 일로도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가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한 분이 그랜드피아노 한 대를 교회에 헌물했습니다. 모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소한 일로 교인들의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한 부류는 그랜드피아노를 강단 오른쪽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교회의 구조상 왼쪽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일로 시작을 했는데, 점차 감정싸움으로 이어져서 결국은 그 일로 말미암아 교회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는 라이트처치, 다른 한 편은 레프트처치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립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큰 건물도 아니요, 땅도 아니요, 은행 잔고도 아닙니다. 신앙과 덕망이 높은 일꾼이 있는 교회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된 교회요,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봉사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교회의 큰 재산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오직 주님께 영광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합쳐지고, 그 합쳐진 의견에 대해서 서로 힘을 합쳐 나갈 때 그 교회는 정말 실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용납하는 곳이 되어야지, 비판하고 싸우고 갈라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모든 것들이 용납되고, 용서되고,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되고, 판단하게 되며, 그로 인해 교회의 화평은 깨어집니다.
교회의 참 재산은 ‘화평을 이루는 성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분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가장 평안한 교회로 만들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기반을 가지고 올바른 말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역량을 가지고 각 교회가 지역사회와 세계 복음화에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