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다. 서로 교제하려면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대화란 묻고 답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큐티하면서 질문을 활용하면 훨씬 깊고 넓은 묵상을 할 수 있다.
관찰을 위한 질문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언제 어디서인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그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질문을 통해 본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유를 묻는 ‘왜’ 질문은 묵상을 풍성하게 해준다. 이번 글은 묵상에 큰 도움을 주는 ‘왜’ 질문에 대해 나누어 보려 한다.
유익한 질문과 무익한 질문
묵상에 도움이 되는 질문도 있지만, 필요 없는 질문도 있다. 본문에서 답을 찾을 수 없거나 유추할 수도 없는 질문이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5장의 혈루병을 치유 받은 여인에 대해 묵상할 때, ‘왜 혈루병에 걸렸는가’라고 질문을 만들면 곤란하다. 본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반면에 ‘왜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을까’라고 물으면 다양한 묵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혈루병이 여인에게는 숨기고 싶은 질병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 혹은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나을 줄을 믿었던 여인의 큰 믿음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앞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뒤로 와서 옷자락을 만졌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답을 찾아보며 다양하고 풍성한 묵상을 할 수 있다.
질문을 만드는 훈련
필자는 큐티 훈련을 할 때 묵상을 위해 세 가지 이상 ‘왜’ 질문을 만들고 본문을 통해 답을 찾아보라고 한다. 처음 대부분의 경우 질문 만들기를 힘들어한다. 그동안 성경을 읽을 때,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배웠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어려워한다. 그냥 ‘믿습니다’ 하면 좋은 믿음이라고 하는데, ‘왜’라고 묻고 의심하면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무조건 믿으면 맹신에 빠질 수 있기에 위험하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스토리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자연스럽게 읽는 과정을 통해서도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본문도 있지만, 다양한 질문과 묵상을 통해서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훈련생들이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본문 속에서 답을 찾는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묵상이 깊어진다.
질문을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왜’를 붙이기만 하면 된다. 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시는가? 왜 여인은 두려워 떨었을까? 이런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묵상에 유용하고 의미 있는 질문을 만들 수 있다.
질문을 통한 묵상 법
질문을 토대로 어떻게 묵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왜 예수님이 자기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을 찾으실까? 라는 질문을 통해 묵상해 보자. 가장 중요한 점은 본문 속에서 객관적인 답이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본문을 보면 여인이 옷에 손을 대자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은 줄 알게 되었다. 예수님도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셨다. 따라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질문은 단순히 내 몸을 누가 건드렸느냐는 물음이 아니다. 누구기에 내 옷에 손을 대어도 자기의 병이 나을 줄 믿는 믿음을 가졌는지 궁금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장 귀하게 보신다. 어떤 사람의 외모나 직업이나 재산을 보지 않으신다. 그 사람에게 있는 믿음을 보시고,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신다.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의 주인공이 궁금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라는 본문이 이런 묵상을 뒷받침해 준다.
왜 질문을 만들 때 최소한 본문 속에서 답을 찾거나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에 근거하지 않고 답을 찾으면 묵상이 아니라 상상이 되고 공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지면에 제한이 있기에,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한 행간에 담긴 의미라든지 그분의 변함없는 성품에서 유추할 수 있는 묵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성경은 통일성을 가진 말씀이기에 성경 전체의 줄거리를 벗어나지 않는 상상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왜 질문을 사용한 묵상의 실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구절로 묵상을 해보자.
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나? 왜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하셨나? 왜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셨나? 이런 질문을 만들 수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기는커녕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염려하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명령이니 이유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순종해야만 하나?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는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염려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염려를 기도로 바꿀 수 있음이 믿음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간구는 구체적인 제목으로 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기도와 간구를 하라는 말씀은 기도하는 중에 간구할 제목을 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고 하신 것이다.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셨는데, 순서가 중요하다. 염려할 일이 많은데 처음부터 감사로 아뢸 순 없다. 기도하면서 염려가 사라지고, 간구하는 중에 감사할 제목들이 생각나게 된다. 따라서 감사로 기도를 마무리하라는 말씀이다.
잘 알려진 말씀이나 이해하기 쉬운 말씀 가운데, 의외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이 꽤 많다. 조금만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와 약속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묵상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셨을까? 왜 첫 이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일까? 왜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지라고 하셨을까? 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을까? 왜 다윗은 사울의 미움을 받았을까?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 왜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을까? 왜 왜 왜?
인격적 관계는 질문으로부터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을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별로 없다.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교과 내용과 상관없는 질문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학생의 질문을 무시하거나 불성실하게 답해 버리고 지나치는 교육 과정에서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주일학교를 다닌 때도 질문하는 것은 금기시되긴 마찬가지였다. 믿음과 지성의 조화를 가르치기 보다는 믿음을 우선하는 교육을 받다 보니 질문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믿어버리거나 순종해 버린다.
믿음이나 순종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인격적인 관계라면 서로의 생각을 묻고 내 생각을 말하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관계처럼 적용하지 말라고들 하신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인격을 소유하고 계시기에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을 싫어하지 않으신다.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를 귀찮아하는 철없는 엄마가 아니다.
큐티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다. 질문을 만들고 답을 듣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풍성한 교제를 누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