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공중의 새도 기르시는 하나님

유학이민 러시
1992년 연말부터 시작된 뉴질랜드 기술이민은 5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그야말로 1860년 뉴질랜드 남섬의 골드러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뉴질랜드에 많은 외국인이 동시에 대거 몰려들었고 그들 대부분이 뉴질랜드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경제의 중심지이고 국제공항이 있는 오클랜드로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도 취업의 기회나 비즈니스 기회가 많은 오클랜드에 정착하였고 자연스레 종교단체 위주로 교민 사회가 형성되었다. 우리는 당연히 교회에 출석하였고 유학과 이민의 다양한 정보를 교인들 간에 주고받으며 비즈니스도 활기를 띄었다.

우리도 취업보다는 자영업을 하는 게 현실적이다 싶어 같은 교회 교인이 운영하던 액세서리 가게를 인수하여 아내는 액세서리 도소매업을 했고 나는 추가로 여행사와 관광 가이드를 겸업하였다. 직업상 잦은 출장으로 집을 많이 비우면서도 서로의 사업을 통하여 경제적으로도 제법 수입이 좋아서 만족할 만한 유학이민생활을 하였고 교회생활도 열심이었지만 세상적으로도 뉴질랜드의 아웃도어 라이프를 더불어 즐기면서 살았다. 또한 유학생들도 쏟아져 들어와서 우리 친인척은 물론 가족 지인들까지 입국이 이어졌는데 일주일이 멀다 하고 공항에 마중 나갔었으니 그 만큼 교민 비즈니스도 활기찼다.

그러다 보니 최초 김포공항을 출발할 당시 레마의 말씀으로 주셨던 여호수아 성경 구절보다는 은행잔고를 더 자주 들여다 보고 점점 더 신앙생활은 최소화, 사회생활은 극대화 되어가고 있었다. 일례로 한국에서 여행사를 통하여 패키지 관광객이 오면 현지에서 남북섬을 다 안내하는 로컬 가이드를 했는데 주일이 포함된 관광 팀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시작을 하였으나 팀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주일을 포함하는 일정을 행사하는 경우가 생겼고 더 많은 수입이 생기니 더 많은 헌금을 해서 면죄부를 사면되겠다는 자기 합리화하는 가운데 내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IMF로 초토화된 유학과 이민
이렇게 유학이민 러시와 함께 오클랜드에는 교민이 금방 2만여 명이 넘어서면서 부동산, 은행, 유학, 이민, 관광, 식당 및 식품점은 물론 미용실과 청소 등 서비스업까지 어떤 비즈니스를 해도 잘 되었고 교회도 매주 새 신자 등록 행렬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천당 다음 999당이 뉴질랜드인 것처럼 느껴졌던 그때 뉴질랜드는 물론 해외에 살던 우리 한국 교민들과 유학생들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대비하지 못한 상태로 한국은 IMF를 맞이 하였다.

우선 환율이 두 배로 껑충 뛰면서 유학생들은 감당이 안되어 대부분 귀국하게 되었고 관광객도 물론 찾아볼 수가 없게 되는 등 한국 의존도가 높은 비즈니스 즉, 이민, 유학, 관광 등의 업종은 직격탄을 맞아 회생 불가능 상태가 되었다. 우리 가정도 액세서리 가게도 빅토리아 파크 마켓이라고 하는 일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일종의 뉴질랜드 야시장 스타일이라 매출이 현격히 줄었고 여행 업에 종사하던 나는 수입이 전무하게 되어 벌려놓은 일들과 집 융자 상환 등이 문제가 되어 시간이 갈수록 빚으로 쌓이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재정적 어려움과 부채를 갚아 나가야 할 걱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니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교회 가서 무릎 꿇고 회개하며 기도한들 이미 때는 늦은 시점이었다. 당장 하루하루가 지옥이던 시절이었다.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고 각종 공과금과 매달 집 모기지 이자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 상황이라 오늘 하루는 또 어찌 버틸까 생각하면서 새벽기도 다녀와서는 하루 일과가 우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구하고 그 동안 가깝게 지내던 교인들이나 지인들을 만나 급전이라도 마련해야 했다.

세상 야속한 것이 민심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내가 허황된 기대를 가졌던 갈까? 어느 누구도 나의 절박함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누가 급전을 융통하여 주겠는가? 이역만리 이곳에 일가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설사 동기간이나 친척이 있다 해도 나올 것이 없는 나에게 무슨 기대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씀을 통한 주님의 음성과 결단
이제 집 모기지도 두 달을 갚아나가지 못하자 은행에서 모기지 세일을 하겠다고 겁주고 내가 두 손을 놓게 되면 진짜 생계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돈을 꾸려고 안 가본 데가 없고 안 만나본 지인이 없을 정도였는데 아마 뉴질랜드에 사채가 있었다면 신체포기각서를 쓰고서 라도 변통을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너무 절망적이고 지쳐서 “하나님 어떻게 해요” 라고 독백을 하면서 설교 말씀을 듣는데 성경 마태복음 6장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의 말씀이었다.

이때 깨달음을 주시는데 ‘내가 너를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씀이었다. 물론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데 어찌 가만 있으라는 말인가 의심이 들기도 하였지만 ‘어차피 어디 돈이 나올 데도 없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이니 한번 주님 말씀 믿고 나아보겠습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며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고 앞으로 평생 다시는 남에게 꾸러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걸어 나왔다.

그랬더니 그날 오전 드디어 첫 기적이 시작되었다. 은행에서 연락이 왔는데 한국 직원이 고등학교 선배 부인이었는데 본인이 융자를 담당하고 있는데 너무 안쓰럽다고 밀린 두 달치 금액을 대신 갚아줄 테니 나중에 갚으라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작심한 마음이 없어질까 봐 주님께서 급하셨는지 바로 그날 아침에 응답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달치 은행 모기지 갚았다고 생활이 당장 나아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생활고에 허덕이기 마련이었는데 또 며칠 지나지 않아 출석하던 교회 목회자 내외가 집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어떤 분이 교회에 어려운 가정을 위하여 구제에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2천불을 헌금하였고 기도 중에 우리 가정이 생각나서 절차를 거쳐 우리 가정을 돕기로 하였다고 들고 온 것이었다.

눈물 없이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 이었고 도우심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기도에서 받은 말씀과 작정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 작심이 변하지 않도록 기도부탁하며 내 자신이 다시금 굳게 다짐한 결과 이 일이 있고 30년 가까워 오는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돈을 꾸러 다니지 않았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럼 그 동안에 내가 평생 풍족할 정도로 물질의 축복을 그 만큼 많이 받았을까?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는 못했다. 한때 사업이 잘 되어 오클랜드에 집을 세 채나 샀을 만큼 전성기도 있었지만 부동산 폭등 시기는 아니어서 별로 재테크를 하지는 못했다.

뉴질랜드에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 했고 두 딸은 고등학교를 뉴질랜드에서 졸업하고 한국으로 대학을 진학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혼할 때까지 시즌마다 때마다 계속적으로 돈은 필요하기 마련이다. 한번은 당장 내일 집을 사고 잔금을 치러야 하는데 일정 금액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물론 비즈니스도 잘 되어 돈을 융통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돈을 꾸지는 않겠다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한 결과 갑자기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서 집사는 데 보태라고 딱 부족한 금액만큼 송금해주시는 등 물질은 물론이요 필요한 것들을 절묘한 타이밍에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만난 주님을 교회에서 교인들과 나누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주님을 믿고 그 분께 맡겨보라고 했고 유학원을 운영하며 많은 학생들과 가족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같이 기도하자고 하면서 조지 뮐러의 기도수첩과 같은 나의 기도수첩을 보여 주었다. 기도 시작한 날과 제목이 쓰여 있고 응답 받은 날이 적혀 있는 기도 수첩이 그들에게는 놀라웠을 것이다.

지금도 기도수첩을 작성하고 있고 아마도 나의 유학과 이민 삶 속에서 신앙의 여정의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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