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권수경 교수가 어떤 교회의 집회를 마치고 한 초등학생에게서 받은 질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날카로운 질문에 권 교수는 나름대로 진땀을 빼며 설명하고 위기를 잘 모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몇 년이 흐르고 나서 자신에게 질문했던 그 초등학생에 대한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는 그 후에 과학에 더 많은 관심이 생겼고 진화론에서 설명하는 빅뱅 이론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또래 친구들이 모두 입교를 받을 때 그 아이는 혼자 입교를 거부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물론 아직 부모를 따라 그 교회에 예배는 출석한다. 그러나 자신의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한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 크리스천이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번 강좌의 강의를 맡은 권수경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그리고 예일대학에서 철학신학과 종교철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뛰어난 인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땅에서 이미 목회자로 30년 이상을 실제 성도들과 어울리며 살았던 평범한 이민 목회자 중의 한 명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권 교수의 강의는 상당한 통찰력이 있지만 동시에 아주 쉽고 편안하게 공감대를 이루어 낸다.
권 교수가 다원화 사회를 강의의 배경으로 정한 이유는 교회가 직면한 포스트모던 속의 변화를 실제 삶에서 실감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의 한사람으로 강의 내용에는 포스트모던의 사상적 특징과 또 데리다 또는 푸코 같은 포스트모던의 유명한 학자들을 언급하지만 항상 그 결론은 크리스천과 교회가 이 문제들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라는 실제적인 도전을 던져 준다.
개인적으로 20년 이상을 이민교회의 목사로 어려운 현실 속에서 고민하던 나에게는 지식 이상의 감동과 실제적인 도전을 주는 강의였다. 어쩌면 해답보다는 고민과 반성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자연과학의 도전
우리는 그동안 진화론은 창조론의 반대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진화론을 거부했다. 아니 교회에서는 진화론을 언급하지도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는 동안에 진화론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였고 또 학교를 통해서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에 생각보다 더 깊게 자리하고 말았다.
최근에 진화론에 대한 논쟁은 4개의 스펙트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진화의 산물로 생각하는 진화론이다. 물론 이 진화론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전혀 없다. 하지만 신의 존재가 아니고는 풀어내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로는 유신 진화론이다. 요즘은 진화창조론이라고도 부르는 두 번째 부류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진화를 사용하시어 세상을 창조하고 운영하셨다고 보는 관점이다. 물론 간단히 보면 진화론이 풀어내지 못하는 부분에 하나님을 등장시켜서 완벽한 설명을 시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론은 창조와 진화의 완벽한 조화라기 보다는 진화의 부족한 부분을 창조로 보완하려고 했던 시도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이론은 성숙한 지구 창조론과 젊은 지구 창조론이다. 둘 다 창조론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우리 기성세대가 잘 알고 있는 그 창조론이다. 교회가 시간 동안 고수해 온 입장이고 또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창조과학회라는 단체가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에 앞서 왔다.
그러나 요즘은 점점 젊은 지구 창조론을 통해 증명하기 힘든 과학적 증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성숙한 지구 창조론이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나이를 처음부터 성숙한 상태로 창조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4가지의 이론들은 모두 흥미롭고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창조와 진화에 대한 이론들이 점점 세분화되고 다양화된다는 것 자체가 포스트모던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각각의 주장을 펼치지만 모두가 완벽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와 다양성에 교회인 우리들은 정말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 준비는 둘째 치고 이러한 변화들과 우리 자녀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 것을 교회는 알고 있기는 한 것인가? 강의를 듣는 내내 마음속에서 무거운 짐이 내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들의 자녀들은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믿고,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믿는 진화된? 믿음으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교육받은 진화론에 대하여 교회인 우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다원화 사회 속에서는 덮어 놓고 믿는 방식의 창조론을 가지고는 변화무쌍한 진화론의 교육을 받는 자녀들과 대화를 시도할 수 없다. 더 깊은 연구와 더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장이 교회인 우리들을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의 도전
권 교수는 2020년에 자신의 저서인 ‘변하는 세상 영원한 복음’이라는 책에서 우리 시대의 교회와 복음에 대한 공격의 실체로 자연과학의 발달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의 도전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2년 뒤인 2022년 그의 예언대로 ChatGPT가 출시되었다.
ChatGPT는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이 얼마나 우리들의 삶과 가깝게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인공지능에 대한 교회들의 반응은 대혼란 그 자체이다. 인공지능은 미국에 있는 유명한 갑부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정도인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핸드폰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목사가 일주일을 고민해서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 만들어 내는 설교보다 훨씬 더 내용도 좋고 문장도 뛰어난 설교를 순식간에 만들어 내는 도깨비방망이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옆 동네 불구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 되었다.
심지어 그렇게 ChatGPT를 통해 작성된 설교를 유명한 목사님의 얼굴이 등장하는 동영상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분야에서는 누워서 떡먹기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목사는 ChatGPT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최고의 변명으로 인공지능을 우리들의 현실에서 무시해 보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간단하게 무시하기에는 인공지능의 분야는 교회인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게 들어와 버렸다.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아직도 두 가지가 있다. 인공지능이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삶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두머(Doomemer)그룹과 반대로 인공지능이 반드시 인간의 삶을 향상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부머(Boomer)그룹이다.
두머그룹의 대표적인 사람이 스티븐 호킹스 박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호킹스 박사는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상당 부분 극복한 사람이다. 그래서 원래 말을 할 수 없던 호킹스 박사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며 강의하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그러한 발전이 결국 인간을 망쳐 놓을 것으로 예상했고 자신이 죽기 전 인공지능의 발전을 제안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다가 결국 생을 마감하였다.
물론 호킹스 박사는 크리스천의 입장이 아니지만 그가 경계하였던 조절할 수 없는 인공지능의 개발과 인공지능의 자가발전을 막는 것이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반드시 1등이 되어야만 살아남는 인공지능의 분야에서 그 치열한 경쟁은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것을 내어놓는 결코 멈출 수 없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공지능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루에 1만 번 이상의 바둑을 둘 수 있는 인공지능은 하루에 겨우 3번 정도 대국을 치를 수 있는 인간에 비해 실력과 기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이 발전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앞으로는 바둑 천재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기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제 그 모든 분야에서 인간보다 앞선 인공지능은 그것을 하나로 모아서 마치 인간을 대신하는 어떤 존재가 되려고 준비 중에 있다. 어쩌면 유발하라리가 예언한대로 인간을 대신하는 새로운 인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결합으로 신적인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인류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분야가 교회를 향해 던지는 도전장은 단순히 목사가 ChatGPT를 사용해서 설교를 준비할 것인가? 아니면 목사보다 설교를 잘하는 기계가 나와서 목사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인가? 등의 도전이 아니다.
결국 인공지능의 진짜 도전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부분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오히려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존재, 아니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가 정말 등장하는가?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지켜야 할 것인가?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놓고 보존하신 것인데 결국 인간은 스스로 우리의 존엄성을 훼손하면서 무엇을 위해 질주하고 있는가를 한 번쯤 깊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권 교수는 세상을 보는 그의 탁월한 눈으로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교회의 무지와 무방비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위기를 인식하고 교회들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도전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도전
권 교수의 강의 내용에 상당한 부분은 포스트모던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지금의 다원화된 사회의 원인을 포스트모던에서 찾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자연과학의 도전과 인공지능의 도전도 어떤 면에서는 포스트모던 속의 특징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포스트모던 속의 하나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던에 대하여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직접 포스트모던에 대한 강의도 하였고 관련된 서적도 한동안 심취하여 살펴본 적이 있다.
그런 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주제가 등장하자마자 권 교수에게 질문하였다. “포스트모던은 끝이 있습니까?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음은 어떤 시대가 올 것이라 예상하십니까?” 이러한 나의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권 교수는 대답했다.
“포스트모던 시대 이후는 없습니다. 포스트모던은 모더니티의 반대로 일어난 현상이기에 결국 끝이 있다면 그것은 모던으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권 교수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래에 대한 이 답변은 사실 지금의 수많은 현상들을 설명해 주는 아주 분명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지금 우리들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대부분이 심화된 갈등의 모습들이다. 정치도 우파와 좌파로 극심하게 나뉘어져 토론하듯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모더니티와 반모더니티가 충돌한다. 포스트모던은 한마디로 모더니티와 반모더니티가 충돌하는 시간이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그 갈등의 끝은 타협이 아니라 파괴뿐이다. 결국 결론은 이 갈등들의 마지막을 파괴가 아닌 평화적 공존으로 이끄는 것이 교회인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권 교수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강의 내용들은 정말 탁월하다. 내 자신이 포스트모던에 대한 짝퉁 강사였음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는 강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강의의 결론이었다. 포스트모던이 우리의 아군인지 적군이지를 논해야 하는 시간은 지나 버렸다. 오히려 이미 포스트모던 속에 깊게 들어와 있음을 인정하고 충돌이 아닌 평화적 공존을 만들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한 시간이 되었다.
예를 들어서 모던시대까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며 거대담론으로 자리했던 우리들의 복음이 거대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의 담론을 서로 인정해야만 하는 포스트모던을 만났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거대담론인 복음이 스스로 하나의 작은 담론이 되어서 또 다른 사람의 담론이 되어지는 이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가?를 찾아내야 한다. 교회인 우리들은 타협하지 않고도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성도들에게 주어야만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끝이 나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인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끝나기 위해서는 모던시대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모던에 대한 모든 그림자가 다 지워져야만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답이 없고 혼란만 있는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 평화적이면서도 공존이 가능한 길을 찾아내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다급히 필요할 뿐이다.
도전장을 받아들이며
이번 권 교수의 강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나는 문뜩 우리 교회에 한 고등학생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엄마를 따라 예배에 참석하던 사춘기 아이였다. 동생들은 주일학교 나이라 교회 내에 친구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다녔지만 이 학생은 또래 아이들이 몇 명 없어서 늘 엄마 옆에 붙어 있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예배 후 교제 시간에 우연히 그 아이가 친교실 한쪽 구석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그 학생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그 당시 분위기는 마치 꼰대 아저씨의 입에서 도대체 무슨 말이 나올까?를 잔뜩 경계하는 사춘기 소녀와 남의 다리 긁고 있는 듯한 아재 개그로 무장한 꼰대 아저씨와의 어색한 대화 같은 분위기였다.
그 당시 나는 설교 시간에 들은 말씀 중 궁금한 것이 없는지를 그 아이에게 묻고 있었는데 그 아이의 엄마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목사님, 얘는 요즘 진화론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오~ 그래? 진화론 좋지~. 목사님은 창조론을 믿지만 진화론도 좋아해.”
내 대답을 들은 아이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말도 안 되는 내 표현에 씨익 웃어주었다. 그동안 그 아이는 교회와 진화론은 원수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화론에 관심이 있는 자신은 창조론을 설교하는 목사와는 말도 섞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창조론을 믿는 목사가 진화론을 좋아한다~”라는 말 한마디가 그 아이의 마음을 활짝 열었던 모양이다. 경계를 풀고 나를 향해 웃음을 던져 주는 그 아이의 표정이 나에게는 이 강의의 결론이 되었다.
오늘날 소통의 문을 닫고 스스로 꼰대를 고집하는 교회인 내 모습을 스스로 보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 포스트모던을 거창한 시대의 흐름으로 강의하던 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허점을 찌르는 강의였다. 권 교수는 이 세상의 도전장을 받아들이기 위해 연구소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이든 해 보자고 한다.
교회인 우리들이 지금의 다원화된 세상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 대화를 시도하고 평화적 공존을 준비한다면 분명 복음은 더 확장되고 하나님 나라는 더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_강성준 목사<코람데오 신학대학원 사무처장, 웰링턴 그리스도의 편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