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편지를 부치고 싶어도

연말이 되면 생각나는 아버님
해마다 연말이 되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난다.

그 추운 겨울 저녁 아버님은 무엇 때문에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으셨을까? 저녁 드시고 어머님이 설거지하는 동안 잠깐 산책 나갔다 오시겠다고 나가시는 뒷모습을 힐끗 보신 게 마지막이라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설거지 끝내고 왜 이렇게 안 돌아오시나 아버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머니에게 걸려 온 전화는 경찰서에서부터 온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알리는 전화였다. 택시를 타고 달려 병원으로 가셨지만 어머니를 기다리고 계신 분은 영안실에 싸늘하게 식어 누워 계신 아버님이었다. 아무리 붙잡고 소리치고 울고 흔들어도 아버님은 깨어나지 않으셨고 겨우 정신을 차려 우리 형제들에게 전화를 하셨다.

우리 내외와 형 내외가 거의 동시에 천호동 원호병원 영안실 문을 박차듯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돌아가신 아버님보다 그 옆에 백지장같은 얼굴로 앉아 계신 어머니를 붙잡고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누워 계신 아버님을 뵙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분답지 않게 아버님의 얼굴은 평안하셨다. 평소의 자애로운 모습 그대로 셨다. 산책하시는 아버님을 트럭이 뒤에서 덮쳤고 졸지에 받히셨기에 내상의 충격으로 인해 돌아가셨지만 신체가 많이 상하지 않으셨다는 병원 측의 설명을 나중에 들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저희가 가까이 모시고 살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이렇게 혼자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저희들은 천하의 불효자식들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평안히 가십시오. 어머님 걱정은 하시지 마세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슬픔과 자책으로 우리 형제는 울며불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속에 든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아버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이 그 자리에 누워계셨다. 그때의 슬픔과 회한을 지금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나나 형이나 왜 살아계실 때 좀 더 가까이 모시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전화라도 자주 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회한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이 12월 30일이었다. 남들은 차례를 지내고 식구들이 모여 떡국을 먹는 1월 1일에 우린 언 땅에 아버님을 묻고 산을 내려왔다. 나는 저 추운 곳에 저 양반을 놔두고 혼자 못 내려가니 나도 함께 묻어달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우시다 끝내 혼절해 버리신 어머니를 우리 형제들이 떠메듯 업고 안아서 모시고 산에서 내려왔다.

세월이 흘러도
그렇기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아픔과 슬픔은 평생을 통해 가슴속에 남아있다. 그러다가 12월만 되면 오래된 통증이 도지듯 그때의 아픔과 슬픔이 되살아난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은 지나간 날을 뒤돌아보게 하는 달이기에 먼 옛날 추억의 그림자들이 살며시 움직거린다. 그 그림자들이 어느 순간 밀물처럼 포말을 일으키며 가슴속 깊은 감성의 벽을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12월이 되고 연말이 되면 그 옛날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가족이 다 모였던 정경이 떠오른다. 우리 자식들이 각기 준비한 선물과 카드를 드리면 선물보다 먼저 카드를 펼쳐보고 그 속에 적힌 아들딸의 편지를 읽으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던 두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참 행복하던 시절이었건만 그때는 그 행복을 지금만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살아만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만 계신다면 이 연말이 이렇게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고국의 형제들과 친구들과 카톡으로 주고받는 안부와는 달리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휴대폰이 없던 그때처럼 흰 백지에 만년필로 정성껏 편지를 써서 전해드리고 싶다. 하늘을 날아 바다를 건너 부모님 손에 들어간 내 편지를 열면서 기쁨으로 떨릴 부모님의 손길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싶다.

아, 그러나 이제는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전화를 걸고 싶어도 이 땅에 아니 계신 부모님, 그 부모님이 올해 연말엔 왜 그렇게도 그리운지 가슴이 아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기가서(寄家書)
한참을 회한에 잠겨 옛 기억을 더듬다가 나는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기가서(寄家書)라는 시(詩)가 생각났다. ‘집에 편지를 부치며’라는 뜻의 기가서(寄家書)는 조선 시대의 시인 이안눌(李安訥 1571-1636)의 작품이다.

欲作家書說苦辛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이곳에서의) 괴로움을 말하고 싶어도,
恐敎愁殺白頭親 흰머리의 부모님을 근심시킬까 걱정되어
陰山積雪深千丈 (이곳의) 그늘진 산과 쌓인 눈의 깊이가 천 장이지만
却報今冬暖似春 도리어 올해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말씀드리네.

이 시는 이안눌이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북쪽 변두리에 가 있을 때 집으로 편지를 보내며 지은 시이다. 이 시를 짓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집에서 이안눌에게 편지와 겨울옷을 보냈는데 해를 넘겨서야 겨우 받았다. 그렇게 받은 옷이었지만 그동안 북쪽 변방에서 고생이 심해 몸이 야위어서 아내가 예전 치수대로 지어 보낸 옷이 너무 커서 입을 수가 없었다. 따뜻한 남쪽 고향을 떠나 눈이 깊게 쌓이는 추운 산악 지대에서 고생스럽게 지내 몸이 야윌 정도였지만 막상 이런 어려움을 편지에 쓰려고 하니 걱정하실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오히려 ‘올해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라고 거짓 말씀을 드려 안심시켜 드렸다는 내용이다.

자식은 나이가 어떻든 부모에겐 어린 자식일 따름이다. 이런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효자이다. 기가서(寄家書)를 지은 이안눌의 마음이 올해 연말엔 더욱 가슴을 저미고 들어온다. 하지만 그렇게 거짓말로라도 부모님 마음을 달래는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이안눌은 지금의 나보다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만 살아계신다면 나는 이안눌의 기가서(寄家書)보다 훨씬 더한 거짓말이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아주 길고 긴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한국과는 계절이 정반대인 이곳 뉴질랜드의 연말은 여름이 한창이라 밤 9시가 되어도 아직 환하다. 오늘 12월 30일, 저녁 9시가 지났건만 아직도 희뿌연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차라리 그 옛날 아버님이 돌아가셨던 날처럼 어두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 어둠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지난날의 그 슬픔과 회한을 조금은 쉽게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촛불 하나 밝히고 그 옛날의 이안눌처럼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인편으로도 우편으로도 보낼 수 없으니 이 저녁 부는 바람결에 날려 보내면 부모님께 갈 것 같았다.

그 옛날 부모님께 편지를 쓸 때처럼 겉봉에 내 이름을 쓰고 본제입납(本第入納)이라고 쓰면 하늘나라 어딘가에 계실 부모님께서 알아보시고 덥석 반갑게 받아보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불현듯 책상으로 돌아와 흰 백지를 꺼내고 만년필 뚜껑을 열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 전 상서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 불효자식이 먼 나라에서 안부 편지 올립니다. 지난 여름 두 분 산소에 성묘 갔다가 곱게 자라는 떼를 보고 하늘나라에 계신 두 분이 평안하시구나 생각했습니다. 고국 떠나 멀리 있기에 제때 성묘도 못 하는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세월이 많이 흘러 불효자식의 나이가 두 분 살아계실 때의 나이보다 많아졌습니다. 겨우 자식 둘 키우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부모님 생각했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귀하기만 했던 그때, 우리 남매 다섯을 어떻게 키우셨을까 생각할 때마다 두 분께 감사했고 죄송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옛 말씀의 참뜻을 자식을 키우면서 깨달으며 그럴 때마다 두 분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저희 자식들이 좀더 효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가슴을 치며 회한에 휩싸여도 두 분은 안 계셨습니다.

오늘 12월 30일, 그 옛날 이날에 아버님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고 눈물과 슬픔 속에 사시던 어머님은 곧이어 아버님 따라가셨습니다. 세상은 새해를 맞는다고 분주하지만 저는 두 분이 그리워 편지를 씁니다.

두 분 계실 때 보다 세상은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는 자식 걱정 마시고 더 이상 눈물도 슬픔도 없는 하늘 나라에서 두 분 부디 평안하십시오.
살아생전의 다정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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