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가난 . 결핍 . 그리고…

98년 어느 날, 서울 월곡동 밤골 아이네 공부방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빼곡해졌지만 서울의 몇 남지 않은 달동네 중 월곡동이란 동네가 있었다.

1970년대 가파른 산업 발전 시기, 지방에서 도시의 꿈을 안고 상경했으나 결국 도시 빈민으로 남아버린 이들이 하루 고된 노동을 마치고, 두 평 남짓 등을 바닥에 붙여 쉴 수 있었던 곳. 재개발 바람이 불어 동네의 한 편은 허물어져 있었고 저 멀리 스카이라인엔 새로 지은 신축 아파트가 하늘과 맞닿아 있어 마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공간 안에 존재하는 듯한 그런 곳이었다.

아직 ‘현재’에도 이르지 못한 그 폐허 속, 살아남은 이들이 공존하는 삶의 환경은 때때로 나와 같은 외지인들을 충분히 놀라게 만들곤 했다.

그곳엔 수녀 두 분이 마련한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이 있었다. 가만두어도 그냥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벽으로 엉기성기 이어진 작고 허름한 슬래브 집은 동네 아이들이 낮 시간 동안 일하러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어울려 공부하고 양육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나: (신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전화로 말씀 나눈 이익형이라고 합니다.
수녀 1: 아,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참 신발! 신을 안쪽에 들여놓으세요. 간혹 동네 아이들이 가져가는 일이 있어요.
나: (그냥 자리에 앉으며) 아… 네… 괜찮겠죠.
수녀 2: 아니에요. 꼭 들여다 놓으세요.

괜찮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인사를 마치기도 전 들려온 수녀님의 친절한 ‘경고’를 무시해서였을까? 내가 벗어 놓은 신발의 한 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자기 구역에 들어온 낯선 이를 추적하던 동네 아이 중 하나가 생각보다 일찍 신을 찾으러 나온 내 모습에 놀라 두 짝 모두를 집어 들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사라진 내 신발 한 짝을 대신해 끈이 다 해어진 슬리퍼 한 짝을 대신 얻어 신고 절뚝거리며 내려오던 달동네, 그 가파른 언덕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2017년 어느 날, 라누이 캐라밴 빌리지
오클랜드엔 가난한 이웃들이 서로를 기대며 동네를 이루고 살아가는 지역들이 있다.

그 중 라누이엔 1950년대 가파른 산업 발전 시기부터 지방에서 도시의 꿈을 안고 상경했으나 결국 삶의 주도권을 백인들에게 내어 주고 만 마오리들의 생이 엉킨 실타래처럼 존재한다. 두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매트리스 하나를 놓고 나면 다른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캐러밴과 캐빈들이 그곳에 사는 도시 빈민들과 함께 그렇게 뒤섞여 있다.

그곳에서 시작된 사역이 해를 몇 차례 넘기고 있을 무렵, 목사님 한 분께서 식료품을 가득 모아 밴에 싣고 매주 이어지는 공동식사를 돕기 시작했다.

나: 어서 오세요, 목사님. 더운데 많이 힘드셨죠?
목사: (짐을 들고 들어오며) 아닙니다. 이거 어디에 두면 될까요?
나: 네, 이쪽으로… 참, 차 문 잠그는 것 잊지 마시고요.
목사: 괜찮겠죠….

괜찮지 않았다. 그날 밤, 그분의 지갑과 전화기가 한 번에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은 이미 그 지갑에 들어 있던 카드가 수없이 사용된 이후 은행에서 이상 거래를 알아차리고 직권 정지한 이후였다. 동네 십 대 초반 아이 넷이 벌인 일이었다.

후에 경찰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로는 아이들은 페이웨이브 한도인 80불 단위로 카드를 사용하고 다니면서 CCTV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막 시작된 사역의 신고식 치고는 참 호된 시간이었다.

가난은 이렇게 범죄와 맞닿아 있다. 20년의 세월을 지나 지구의 서로 다른 반대편에서 나는 빈곤이 저지른 너무도 닮아 있는 두 사건 앞에 서 있다. 어쩌면 가난은 내가 채 알지 못했던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에도 우리 옆에서 이렇게 우리를 갈라치며 조롱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수식어가 우리 사는 사회의 범죄를 옹호하고 그 원인을 변호할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모든 범죄는 피해자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그 행위가 가져온 결과는 반드시 누군가의 피해로 남게 된다. 이것이 그 동기와 상관없이 우리가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그 아이들이 경험한 삶의 시간에 집중해 보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행위가 남겨놓은 피해는 타인의 물질적 손해에 그치지 않고 그 자신의 영혼마저 파괴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아이들이 보이는 이러한 충동적 행위는 아동기에 반복하며 경험한 결핍을 원인으로 두곤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저소득 지역 아동을 진료하고 있는 소아과 의사 네이딘 해리스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정서적 결핍과 신체적 학대가 그 아이들의 성장기 충동성과 폭력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그의 책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에서 보여주고 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정서적 결핍은 그 아이들의 삶에서 바른 관계를 선택하고 그 관계를 유지할 힘을 남기지 않는다. 또한 그 아이들의 물질적 결핍은 그들의 삶을 장기적으로 계획하게 하기보다는 충동적 행위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월곡동의 아이도, 라누이의 소년들도, 내가 경험한 그들의 삶은 범죄라 단정된 사건을 통해서였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그들의 어린 시절은 끊임없는 결핍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들이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은 때때로 범죄라는 창(窓)을 통해 우리 가운데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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