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공의와 사랑

잠언 21:21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He who pursues righteousness and love finds life, prosperity and honor.”

주의 재림이 가까이 왔음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세상은 고통과 혼돈으로 가득하다.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 등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일이 터지고 있다. 이러한 위험이 두려움을 불러왔고 그 결과 사회는 갈수록 경직되고 각박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의 마음과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가치들이 많다.

그중 두 가지가 바로 공의와 사랑이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 공의는 이상적인 가치나 공상 속에 머무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게다가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져 버려 이제는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악과 악의 싸움이 대부분이다. 그 중 어느 편도 들 수 없는 딜레마와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경제적 압박이 심화되고 과학을 신봉하며 극도로 이기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세상 속에서 사랑은 그저 일시적인 감정이나 호르몬의 변화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은 이 두 가지를 끝까지 추구할 것을 호소한다.

공의로 번역된 체다카는 종교적, 도덕적 기준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준의 근거는 하나님의 뜻이다. 곧 공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 없이 순응하는 삶을 가리킨다. 공의는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선택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다.

오늘날 사회가 평화를 상실한 이유는 공의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한편, 인자로 번역된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뜻한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랑이 아니라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말한다.

혹자는 히브리어 중 가장 위대한 단어가 이 헤세드라고 했다. 잠언 기자는 이 두 가치를 사수할 때, 생명(life)과 번영(Prosperity)과 영광(honor)을 얻을 수 있다고 확증한다(NIV는 공의라 번역했지만, 원어는 번영에 가깝다).

이는 과연 현실적인 지혜인가? 과연 악한 세상 속에서 그의 지혜가 유효한 것인가? 공의와 사랑을 추구하는 자가 도리어 배신을 당하고 정죄를 받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 그리스도다. 그보다 공의롭게 사신 분이 또 있을까? 그분만큼 사랑을 몸소 실천한 존재가 어디 있는가?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에서 생명과 번영과 영광을 얻어야 마땅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는 수치와 조롱, 배신과 죽임을 당하셨다. 잠언 기자의 지혜는 그저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말뿐인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예가 된다. 그는 세상에서 미움과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과 번영과 영광을 주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이름보다 높은 이름을 주셨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으며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동일한 기업을 얻게 하셨다.

이것이 시끄럽고 흉흉한 세상 속에 사는 성도가 붙잡아야 하는 믿음이요 삶의 지표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과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공의를 따르길 바란다. 주께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영원한 생명과 번영, 그리고 영광을 함께 기대하며 사랑하는 성도 되길 바란다.

힘의 원리
시편 21:1, 7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O LORD, the king rejoices in your strength. How great is his joy in the victories you give!”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For the king trusts in the LORD; through the unfailing love of the Most High he will not be shaken.

보통 힘의 크기와 힘에 대한 의존도는 정비례한다. 힘이 세지면, 그 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사람은 내재된 힘을 이용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며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렇게 힘이 주는 쾌감과 맛을 본 사람은 자연스레 더 큰 힘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삶의 문제도, 마음의 소원도, 육체의 욕구도 덩달아 커지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힘의 굴레에 들어가게 된다. 힘을 의존하는 인생은 항상 높은 곳을 향하게 되며, 동시에 현재의 힘을 지키기 위해 늘 경계하며 산다. 이것이 극단에 치달으면 절대적인 힘에 집착하게 되고, 방해나 위협이 되는 요소들을 거침없이 제거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최악의 경우 인격과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마치 헤롯왕처럼 말이다

오늘 시편은 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은 앞서 말한 힘에 있어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존재다. 특히나 고대 근동에서의 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의 기자가 고백하는 왕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선포하고 있다. 최고 권력의 상징인 왕이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다.

이 시를 지은 다윗은 몇 차례 힘에 의지해 일을 그르친 경험이 있다. 밧세바를 얻기 위해 권력을 이용해 충신 우리야를 제거했다. 자신의 힘의 크기를 알기 위해 인구조사를 강행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책망하시고 벌하셨다. 당시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행위들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신명기에 왕에 대한 권고의 말씀이 있다. 왕은 병마와 아내 그리고 은금을 많이 두거나 쌓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병마는 군사력, 아내는 주변국과의 동맹을 의미하므로 외교 정치력, 그리고 은금은 경제력을 뜻한다. 왕이라면 당연히 의지하고 키울 수 있는 힘을 경계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장 아름답고 안전하며 강하고 복되다. 반면 성도가 세상 사람들처럼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게 없다. 아무리 목적이 선하다 하더라도 죽은 옛 자아의 힘으로 이뤄내는 것들은 썩은 열매만 맺을 뿐이다.

부모로서, 목회자로서, 직분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힘으로 겸손히 섬기는 것이다. 세상의 힘이 아닌 오직 주님의 힘을 기뻐하고 의지하는 거룩한 백성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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