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혹시 고릴라를 보셨나요?”

23년 11월 16일 목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매년 어김없이 찾아와 많은 사람을 긴장시키는 날, 바로 수능시험을 보는 날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쯤은 대부분 학생들이 D-XX를 적어 놓고 하루하루 마음 졸이며 마지막 시험 정리를 하고 있을 시기입니다. 시험 준비 막바지 한 달여를 남겨놓은 만큼 그동안 자신이 공부해왔던 교과 내용들을 정리하며 젖 먹던(?) 힘을 다해 공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올해 수능시험을 보는 학생들의 숫자는 504,588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에는 올해 고3인 학생들과 재수생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능생 한 명당 학생의 부모님이나 형제나 자매 그리고 조부모님과 가까운 친척, 지인 등 수능생과 관련된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인구의 10% 이상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과연 인류는 언제부터 이렇게 학문 또는 지식을 삶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세상과 인간이 창조된 처음부터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8절)’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니 그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세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자녀들과 후세대들이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았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언제부터 지식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나 출세의 요인이 되었을까요? 언제부터 학교 교육이 필수가 되고 학습능력과 성적이 중요하게 되었을까요? 한 번쯤은 모두들 궁금했을 것입니다. 필자도 중고등학생 시절 시험만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는 “도대체 누가 시험이라는 걸 만들었을까?” 하며 막연한 그 누군가를 자주 원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험이라기보다는 지식을 알아내는 일종의 대화법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상상해 보건대 이러한 철학적 대화법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닌 수준 높은 지적 대화였을 것입니다. 삶을 꿰뚫어 보는 위대한 혹은 사소하지만 값진 지식과 지혜였을 것입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최초의 공식적인 시험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공직자 등용을 위한 시험이 필요했는데, 이때 시험의 형태나 내용은 충분한 시간 동안 공자의 유교 철학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거나 시조를 짓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시험이 시작된 시기는 산업혁명 이후입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그에 맞는 교육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교육이 발달하게 되었고 그렇다 보니 표준화된 시험이 필요해졌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농장과 공장에서 일했던 아이들은 오히려 이를 위해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급격하게 늘어난 학생들을 쉽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괄적인 시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후, 1905년 프랑스의 알프레드 비네가 아이큐 테스트에 해당하는 지능 시험을 개발했습니다. 이 지능검사는 학업이 뒤처지는 학생들을 찾아내어 보충수업을 통해 학습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지능검사가 지금은 얼마나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영역으로까지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1914년에는 미국의 프레드릭 켈리 교수가 객관식 시험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더욱 발달함에 따라 시험의 절차나 형식도 함께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치르게 된 시험이 바로 대학 입학시험입니다. 각 나라의 문화와 특성에 따라 방식이나 절차는 차이가 있겠지만 대학에 가기 위해 거치는 이 시대의 통과의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아시는 대로 우리나라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조선 시대부터 과거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30년을 공부만 해야 했던 어떤 시험. 3년에 한 번 조선 팔도 모든 선비들이 운명을 걸었던 시험. 그러나 최종합격자는 단 33명뿐. 차라리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운 시험.”

EBS의 역사 채널에서 과거시험과 관련되어 위 내용으로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과거제도는 인재의 등용문 제도로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신분 세습이 당연하던 대부분의 나라들과는 달리 평민도 과거시험을 통해 신분이 상승할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 조선 시대 과거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시험을 잘 보기 위해 기상천외한 커닝 작전(?)도 벌어졌습니다. 남의 답안지에 몰래 자기 이름 써넣기, 도포 자락에 예상답안 몰래 써가기, 뇌물로 시험관 매수하기, 외부에서 적어준 답 몰래 전달받기, 심지어 콧구멍 속에 종이 쪼가리를 숨겨오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험장에 들어갈 때 몸수색을 하고 시험 보는 사람 사이의 간격도 여섯 자(1.8m)씩 떨어뜨려 앉혔습니다. 또한, 시험관과 안면이 있는 사람은 다른 시험장소에 배치하고 응시자의 인적 사항은 따로 떼어내어 보관했습니다. 누구의 글씨인지 알아볼 수 없게 하려고 시험관이 다시 적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의 가문이나 배경 등에 대해 일체의 압력이나 청탁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오로지 실력으로만 경쟁하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의 입시 시험장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만 명 중 33명이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순위를 정하여 장원급제자를 뽑기 위해 임금님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험을 치렀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조선 초기 신숙주, 조선 중기 율곡 이이,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 등이 그렇게 해서 치러진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재들입니다. 과연 시험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이렇게 시험에 매달리는 걸까요? 혹시 그러는 사이에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만든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영상을 하나 보여줍니다. 영상에는 흰옷과 검은 옷을 입은 여섯 명의 여성들이 공을 서로 주고받습니다. 질문자가 흰옷을 입은 여성들이 서로 몇 번이나 공을 주고받는지 맞춰보라고 합니다. 대부분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흰옷 입은 여성들이 패스하는 공의 수를 세기 위해 집중합니다. 영상이 끝나자 사회자가 질문을 합니다.

“혹시 지나가는 고릴라를 보셨나요?”

실험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지나가는 고릴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영상을 다시 돌려보니 공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로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면서 정면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고릴라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공을 세는 것에 집중합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여성 한 명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커튼 색깔이 바뀌었는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할까요? 사람들은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게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교육을 받아야 할까요? 세상을 잘 다스리고 돌보려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잘 섬기려면 그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더욱 잘 알아가고 잘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왜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어떻게 잘 사용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고민해 봐야 합니다. 교육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시험을 잘 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학을 잘 가고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 편안한 삶을 사는 수단, 이 시대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진정한 교육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크리스천으로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교육에 대한 철학을 다시 한번 세워보기에 지금, 이 계절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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