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개월여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머물면서 매일 베트남 어학원에서 학업과 함께 한인교회 교류와 최북단 소수 부족을 탐방하고 틈틈이 하노이에서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한인 기독 실업인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여러 한인 기독 실업인들을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지난 세월 경험한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에 대해 상흔이 많은 민족, 강인한 민족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베트남은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유적비가 한자로 새겨져 있지만 프랑스 식민지 100여 년 동안 동아시아 역사가 철저히 외면되었다. 85세 이하 베트남인 대부분은 한자를 배운 적이 없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서구 열강의 지배와 1945년 2차 세계대전 해방 이후에도 북쪽에는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고 1955년부터 시작된 베트남 전쟁이 20여 년 이어진 후 적화 통일되면서 상처투성이의 베트남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지 못하였다.
베트남인들은 자신이 과오를 저질러 놓고도 쉽게 미안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가끔 당혹스러운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식민지배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오랜 시간 익숙해져서 자신의 과오를 실토하는 순간부터 공동체의 적으로 매장되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술인 셈이다. 그런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베트남인들을 오랜 시간 대하면서도 낯설은 그 경험을 넘어서기가 여전히 어렵다.
베트남에서 오랜 시간 사업을 하며 경험한 분들은 베트남 사람들을 강인한 민족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강국 사이에서 저글링을 하면서 영민하게 살아남는 베트남인들의 생존 기술이 대단한 것이 사실이다. 지난 9월 10~1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하노이를 방문하여 역사적인 협정을 체결하였다.
베트남이 그동안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 나라는 모두 4 국가이다. 중국(2008), 러시아(2012), 인도(2016), 그리고 한국(2022)이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으로 20여 년 동안 그들의 땅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적국 미국을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최고단계로 관계 격상시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ASEAN 지역에서 베트남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높이 평가하였고 향후 전자산업 발전, 기후변화 대응, 에너지 개발 등 새로운 국면에서 경제, 과학, 기술협력을 포함해 베트남 발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양국 관계는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길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1995년 관계 정상화 이후 2023년 포괄적 동반자 관계 수립까지 양국 관계가 강력하고 실질적이며 효과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로 인한 100년의 아픔과 미국과의 20년 동안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1986년 개방정책 ‘도이머이’를 실행한 이후 매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베트남 인구의 5% 정도되는 공산당이 베트남 정권을 거머쥔 후 최상위 계층으로 존재하며 모든 권력과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는 마치 북한의 김씨 왕조 일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면서도 공산당 집권 세력은 무력으로 국민들을 밀어붙이지 않고 가려운 데를 긁어줄 줄 아는 영민함까지 활용하여 권력의 무게가 한층 더하다. 쉽사리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육로와 해양에서 중국과 국경을 맞닿고 있는 베트남은 중국에 대해 적개심과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라 정치적으로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지만 마음의 빗장을 쉽사리 열지는 않고 있다.
베트남에서 선교적 접근
선교적 차원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상하 관계가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다가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베트남에서 기업활동을 오랫동안 하며 초대 하노이 한인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최OO 목사가 경험한 초기 일화를 잠시 소개한다.
어느 날, 회사 여직원이 성실하게 일을 잘하다가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둔다 하여 주변에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이가 심히 아픈 것이다. 고엽제 영향으로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 병원에는 고엽제로 인한 아이들이 주로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북베트남 사람으로 고엽제에 노출되었고, 잠복해 있던 고엽제의 병균이 한 세대를 지나 손자에게 나타난 것이다.
베트남전 종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1972년 12월 미군은 라인배커 2차 작전을 따라 1만 톤의 폭탄을 하노이 시가지 전체에 쏟아붓는다. 하노이가 불바다로 폭격당하는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기에 감정 밑바닥에는 여전히 아픈 상흔이 남아있다.
지금도 롱비엔 철교 다리는 참혹한 폭격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해서 당시 참상을 기억하게 한다. 하노이 곳곳에 있는 전쟁 박물관과 베트남전 당시 포로 수용시설이었던 호아로 박물관에는 참혹한 포로들의 당시 모습이 그대로 재연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과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을 겪어 왔기에 위기 시 촌락 간 연대 수준이 매우 높다. 베트남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그 마을 전체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베트남인은 이런 폐쇄된 공동 사회에서 뭉쳐 살다 보니 외부로부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끈끈한 결속성으로 집결되어 전쟁과 같은 어려운 난관도 헤쳐 나가는 강인함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험난한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서 베트남인들이 붙잡고 있는 최후의 보루는 혈연가족이다. 가족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마지막 보호처인 것이다. 그래서 가족을 소홀히 할 수 없고 복음을 받아들일 때도 가족과의 갈등이 발생하면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용서를 구하거나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족만이 그들을 끝까지 보호해 준다고 믿고, 외국인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여 자국민과 외국인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무조건 자국민 편을 들어주는 모습이다.
따라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기 전에 먼저 가족으로서의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충분히 형성되어야 복음 전달이 가능하다. 가족 관계가 될 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갈 수 있다. 물질적인 것에 치중하는 선교적 접근으로는 한계가 있다.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그들에게는 잘사는 외국인이 원조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고 본인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고 나면 그동안의 도움유무와 상관없이 무심한 관계로 되돌아가곤 한다.
1990년대 초 베트남에 초기 진출한 한인들은 주로 봉제공장과 같은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소규모 기업 규모였다면 2002년 이후 삼성과 LG와 같은 대규모 기업들이 특별 혜택으로 들어와서 기반을 닦으면서 지금은 베트남인들에게 한국은 가장 중요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 하노이대학교 한국어학과는 영어학과, 중국어학과 보다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만 입학 가능한 학과가 되었다. 이유는 한국의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되면 다른 외국계 회사보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있는 8,000여 개가 넘는 한국 기업들은 선교의 중요한 전초 기지이다. 기업인들 중에 상당수는 복음 전도의 목적을 가지고 전략적인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신원 에벤에셀의 경우가 그렇고 본죽도 그런 경우이다. 그리고 소규모 회사를 운영하는 상당수 기독인들이 주중 근무 시간을 이용하여 베트남인을 위한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는 경우도 보았다.
사랑으로 그들을 지원하고 세월이 지나 베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가 세례를 받는 경우도 들었다. 베트남인들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우리는 돕는 자로서 선교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6개월간의 하노이 생활을 마무리하고 잠시 한국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사역지 중부 후에로 돌아갈 준비 중이다. 더 이상 막연한 베트남이 아닌 믿음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이 우리의 처소이기도 하다. 베트남 젊은 영혼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해답임을 함께 나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