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북한 소녀의 세 가지 기도

“에브라임아 내개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같도다!”(호6:4)

중국 측 두만강 상류에서 첫 마을 숭선을 지나면 ‘로가’라는 마을이 나온다. 좁게 굽이쳐 흐르는 두만강 물결을 건너 눈앞을 막고 치솟아 가슴이 닫히고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북한의 헐벗은 산, 옛 가난하던 시절 헐벗고 굶주릴 때에 뚫어진 구멍마다 헝겊으로 덧붙인 양말의 뒤꿈치처럼 조각이 나고 비탈진 산이 문을 열면 보이는 동네이다.

기도하는 북한의 고등학교 1학년 소녀
이곳에 밤 10시가 지나면서 도망강(두만강의 닉네임)을 건너와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새벽 2-3시경이면 돌아가는 식량배급 처소가 있는데 밤새도록 웅크리고 엎드려 있던 십육칠 세의 북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북한의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란다.

“너는 밤새 자지도 않고 왜 그렇게 웅크리고 있니?”
“저는 영 잠이 오지 않아 기도하고 있었습네다”
“그래 무슨 기도를 하고 있니?”
“살려 달라고 기도 합네다!”
“굶어서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 합네다. 학교에 가면 동무들이 반도 나오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자주 그렇습니다. 모두 식량을 구하러 갔습니다. 앞으로 우리 인민과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들키면 나와 우리 가족은 다 죽습니다.”
“또 기도 합네다. 한국교회가 물질 때문에 타락했다고 하는데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필자는 이 소녀가 우리에게 너무도 큰 복음의 은혜와 삶의 자유를 축복받은 남쪽의 동포들과 같은 민족과 믿음의 백성에게 보내준 “전령”이 아닌가 생각한다.

북한에 대한 기도와 복음의 전도는 더 이상 선교가 아니다. 북한은 대한민국과 교회와 우리 민족의 생존 문제가 되었다.

러시아에 간 김정은의 속내
북한과 러시아의 대륙을 잇는 유일한 통로가 동해의 물결이 눈앞에 보이는 곳에 놓여있는 철로길이다. 이곳은 백두산의 동쪽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되는 두만강 547.8km 한 많은 민족의 설움을 안고 무단히 달려와 내려놓은 마지막 흔적의 땅이며 조선 왕조 1586년도에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여진족을 물리쳤던 “녹둔도”이기도 하다.

현 러시아의 명칭은 “크라스키노” 1863년도에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해외 첫 이민 역사가 시작된 곳이며, 중국의 용정 옛 간도 땅 1860년도의 조선족 이주와 함께 “고려인”(카레이스키)이란 이름을 얻고 첫발을 디딘 땅이기도 하다.

1937년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171,781명)를 당하기 전까지 침례교회를 중심으로 무려 17개여 고려인 교회가 세워졌었고 지금은 대여섯 개의 북한 땅을 바라보는 한국 선교사들의 기도 처소가 있다.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기 1년 전인 1908년 4-6월에 군사훈련을 하였으며 지금은 “안중근의 단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렇게 결코 짧지 않은 민족의 아픈 역사를 안고 러시아와 북한을 연결하는 두만강 하구의 철로 길을 따라 지난 9월에 김정은이 블라디 보스톡을 가서 푸틴을 만났었다.

또다시 어떤 사건과 역사가 분단된 민족의 한 페이지에 쓰여 지려는 것일까? 얼마나 더 충동하고 얼마나 더 큰 문제와 사건들의 조짐이 일어나고 발생해야 이기와 자기 독선의 깊은 늪과 같은 이념과 태만의 안일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김정은이 핵무장과 마지막 미사일 장착을 위해 러시아의 기술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사용할 재래식 포탄을 거래하려고 갔던 이 땅은 오늘도 민족의 온갖 격동의 세월을 지켜보고 있는데, 교회가 살아야 민족과 나라가 산다고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예배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고치라고 말씀한다. 가장 강대하고 부흥했던 여로보암2세 때 불행하게도 이방 문화로 이스라엘은 가장 타락하고 우상화되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 자기 아내 고멜과 같이 세상을 사랑하고 우상화된 하나님을 배반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경고와 마지막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구약의 호세야 선지자의 기록을 인용하며 그 뜻을 당시의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인애”라고 하신다. 그 사랑과 인애를 예수님은 ”긍휼”로 설명하셨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절).

야고보 사도가 신약의 백성들에게 “긍휼”에 대하여 재해석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표시가 자신에게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긍휼이라는 길을 따라 구속의 역사는 흘러간다. 구약의 호세아 시대나 예수님과 야고보의 시대도, 그리고 사랑이 식어져 가는 이 종말의 시대도 진리는 변함없이 민족과 나라와 개인의 흥망성쇠를 따라 지켜보며 동행하고 있다.

“두만강”을 통해, “크라스키노의 철로”를 통해, 그리고 또 누군가의 가슴을 통해 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긍휼하심의 강”이 소녀의 기도와 함께 저 북녘땅 78년 고난의 백성들을 향해 흘러가기를 원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로다“(호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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