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He who is kind to the poor lends to the LORD, and he will reward him for what he has done.”
아내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던 시절, 결혼식과 신혼살림을 위해 공동명의로 계좌를 만들어 저축했던 적이 있다. 조금씩 꾸준히 하다 보니 목돈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결혼을 몇 달 앞둔 시점에 아내의 직장 동료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에게 빌려줄 수 있는지 물어본 상황이었고 상황이 급박했기에 모아둔 돈의 절반 이상을 빌려주기로 했다. 이 일을 두고 기도하면서 아내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은 돌려받을 생각 말고 그냥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었다.
성령의 감동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 음성에 순종할 수 있었다. 다행히 지인의 문제는 잘 해결됐고, 이후 우리의 결혼식과 살림 마련도 은혜 가운데 넉넉하게 마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후, 우리 가족은 신학대학원 입학을 위해 한국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안정적이었던 삶에서 월 사례 100만 원도 채 안 되는 금액으로 서울에서 3인 가족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보증금 할 만한 목돈이 없어 월세가 월 사례보다 높은 원룸을 구해 살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식하고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로 인해 단 하루도 굶지 않고 3년을 지낼 수 있었다.
그 여러 도움의 손길 중 하나가 바로, 결혼 전에 돈을 빌려줬던 아내의 지인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갚아달라는 요청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연락이 와서 매월 일부를 갚겠다고 한 것이다.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후에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임을 확인하고 받았다.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지만, 매번 재정이 바닥을 칠 때쯤 보내주셔서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빈 곳간을 채워 주시는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움이 필요한 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면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신다. 그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하신다. 보이지 않는 더 큰 은혜를 덤으로 주시기도 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꼭 재정적 지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서적, 언어적, 정신적 지원도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신뢰하여 아끼지 않고 친절을 베풀 때 하나님이 대신 되갚아 주신다.
본문과 같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꾸어 드린다는 표현은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에게 빌리시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친절을 매우 소중히 여기신다. 주의 백성들이 주님의 마음을 실천하여 선을 이루길 원하신다.
주변에 재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가난한 이가 있다면, 돌려받을 생각은 내려놓고 도움을 베풀어 보라. 하나님이 전부 기억하시고 빌려준 것보다 더 풍성히 갚아 주실 것이다. 이로써 삶에 선한 열매가 풍성히 맺히길 기원한다.
여호와께서 열납 하시는 묵상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in your sight, O LORD, my Rock and my Redeemer.”
우리는 살면서 많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그중에는 급조된 선물이 있고 고민한 흔적이 묻어 있는 선물이 있다. 간단한 선물이 있고 정성이 담겨있는 선물이 있다. 큰 기쁨과 감동을 안겨주는 선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선물이 있다.
선물의 질(Quality)은 주는 자가 생각하는 받는 자와의 거리와 비례한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고민과 정성의 양(Quantity)이 늘어난다. 대상과 가까울수록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현재 소유하고 있는지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선별하여 준비한다. 반면,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면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이 그리 복잡하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오늘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최고의 선물을 드리고자 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주님께 드리고자 하는 선물은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다. 이것들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선물이 아니라, 꼭 받아주시길 원할 정도로 정성껏 준비한 선물임이 틀림없다.
그의 말과 묵상은 단시간에 즉흥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다. 다듬고 또 다듬어서 준비한 선물이다.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감동적인 시를 한 편 써 주는 것 같다. 1절부터 11절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에 대한 묵상을 곱씹어 읽어보라. 그의 표현은 참으로 경이롭다. 잠깐 생각해서 나올 만한 표현들이 결코 아니다. 그의 표현은 풍성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주를 향한 그의 순결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선물을 주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도록 죄를 경계하는 정성까지 보인다. 죄가 하나님께 드릴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묵상의 선물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섬세하게 신경 쓰고 있다. 마치 정성껏 포장한 선물에 먼지 하나 앉지 못하도록 주의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기자의 사랑과 정성은 아벨의 제사를 연상시킨다.
반대로, 대충 묵상해서 드리는 입술의 고백, 마음의 죄악은 고스란히 내버려 두고 포장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드리는 선물도 있다. 대상이 어떻게 느낄지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전혀 없는 나 중심적인 선물이다. 가인의 제사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뭇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신다. 주는 겉치레에 속는 분이 아니시다.
오늘 예배, 기도, 그리고 묵상 가운데 임하는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 보자.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어느 쪽에 해당하는가? 아벨의 선물인가 가인의 선물인가? 주께서 우리의 묵상을 기쁘게 받아 주시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