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8:10-11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변화의 속도는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4차 산업혁명에 들어서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혹자는 과거 250년이란 장시간 속에서 일어났을 변화가 오늘날에는 25년 안에 일어난다고 한다. 게다가 그 속도는 더 증가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증가하면 덩달아 상승하는 것이 있다. 바로 심리적 불안감이다. 생각해 보라. 차를 운전할 때 50km로 가는 것보다 150km로 달릴 때 당연히 불안감운 커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불안감의 원인인 정신적 질환자의 수와 술, 담배, 마약 등 불안감을 잠시나마 잊도록 도와주는 것들의 소비가 증가하는 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갈수록 커지는 불안감을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불안감을 감소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무엇인가? 사전에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해서 많은 이들이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견뎌낼 수 있고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을 세우려 애쓴다. 대부분 사람이 선택하는 성은 바로 재물의 성이다.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보다 튼튼한 성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잠언은 이 재물의 성이 허상이라 말하고 있다. ESV에서는 11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부자의 부는 그의 강한 도시입니다. 그의 상상 속의 높은 성벽처럼 말이죠.”
“A rich man’s wealth is his strong city, and like a high wall in his imagination.”
많은 재물이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절대적이거나 영원한 안전이라 할 수 없다. 잠언 기자는 재물을 독수리와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본문은 재물의 성보다 더 견고하고 확실하며 영원한 것을 소개한다.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망대다. 망대는 성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의지할 성벽이 없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안전을 제공하는 장소다. 특히, 적이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그들을 소멸하시며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망대는 그 어떤 곳보다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과 육신의 안전을 위해 재물의 성벽을 쌓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망대를 의지해야 할 것이다. 평생에 주를 의지하여 그 망대의 견고함을 경험하길 축원한다.
시편 18:1-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The LORD is my rock,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my God is my rock, in whom I take refuge. He is my shield and the horn of my salvation, my stronghold.”
말에는 무게가 있다. 가볍게 주고받는 말이 있고, 큰 충격과 감동을 주는 묵직한 말이 있다. 의미 없고 자주 하는 말은 가볍게 느껴지지만 특별한 의미를 담거나 빈도수가 낮은 말에는 무게가 있다.
과거에는 매우 무거운 말이었고 특별한 상황에만 쓰였지만, 지금은 너무 흔히 쓰이고 그 의미도 희미해진 문장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음식이나 활동 등의 비 인격을 향해 사랑을 고백할 정도로 너무나 가볍고 흔한 말로 전락해 버렸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아봤을 것이다. 부모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연인에게 말이다.
그렇게 받은 사랑 고백의 무게는 모두 달랐을 것이다. 인간은 사랑에 목마른 존재이다. 이에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고백과 진심 어린 참된 것을 단번에 분간해 낸다.
전자에는 그 고백의 울림이 마음 중심까지 도달할 힘이 없다. 귓가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물론 사랑한다는 고백 자체에 강력한 힘이 있지만, 그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전후로 진심과 정성이 담긴 무언가 더해져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고백에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의 고백을 보라.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하고 끝내지 않는다. 이어서 줄줄이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묵상, 감사 등의 진심을 더 한다. 그 더해진 고백들이 앞서 한 사랑의 고백을 더욱 아름답게 빛내고 있다.
그가 사용한 단어들을 보라. 반석, 요새, 바위, 방패, 산성 등의 다채로운 비유는 그가 도망 다닐 때 늘 하나님을 묵상했음을 보여준다. 위기 속에서 호위하시며 안식처가 되어 주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그의 고백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왜?”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사랑받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이에 “그냥, 또는 사랑하는데 이유가 필요한가?”라는 쉽고 간편한 대답도 감동을 줄 수 있지만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사랑의 진실성이 증명될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에서 사랑하는 이를 연상하며 연관성을 찾는다. 사랑은 우리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며 시적 감각을 극대화한다. 사랑하는 자는 이미 훌륭한 시인이다.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시를 한 편 지어보자. 성경에 실리진 않겠지만 하나님의 마음 판에 새겨질 것을 소망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