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선교를 지난 호에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그 중심에는 수도원이 있었고, 수도원은 교육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과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문물을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즉, 배움과 선교는 중세시대부터 이미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였다. 그와 동시에 중세교회의 선교를 정의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면 공격적 선교와 방어적 선교이다. 특히 중세 후반 시기에 선교는 수도원을 통한 새로운 곳에 들어가 선교하던 중세 초기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방어적 선교와 공격적 선교의 발전은 그 당시 위협적이었던 이슬람의 확장과 연결되어 있다. 7세기 이슬람의 등장과 폭발적인 확장은 처음으로 서양기독교가 영향력을 끼치던 지역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더불어서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지역들인 에뎃사, 안디옥,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영향권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이슬람의 확장에 큰 위협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확장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네스토리우스파는 아시아 선교를 향해 확장해 가며, 중국으로까지 확장이 되었다. 즉, 시리아 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들은 자신의 근거지가 이슬람에 의해서 잃어버렸지만 선교지를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서 수도원 운동은 이슬람의 확장 앞에서도 지속되었고, 오히려 미개척지였던 북유럽지역을 북유럽을 복음화 시키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위축되는 상황 속에서도 선교는 멈추지 않았다. 위축되지만 단순히 방어만 하지 않고 적극적인 선교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후에 자신들의 기반을 잃어버린 시리아 교회와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그 힘을 잃어버려 또다른 위기를 접하게 되었을 때에 넘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선교의 특징을 만든 방어적, 공격적 선교의 특징이 강화된 것은 단순히 이슬람의 결과이기보다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였다. 끊임없는 이슬람의 공격을 받던 동로마제국, 다른 말로 비잔틴제국은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서방교회는 이때를 기회 삼아서 갈라졌던 동방교회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성지를 탈환하려 하였다.
이 때에 성지 회복이 핵심이 아닌 동방교회를 자신들이 다스리고 싶었던 근거는 4차 십자군 전쟁부터 나타난 예루살렘 공격이 아닌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공격에 있다. 4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십자군들을 보내어 정복하고 약탈하였다. 그 결과가 비잔틴제국이 힘을 잃고 쇠퇴하는 것이었고, 결국 서방교회는 이슬람의 세력에 완충 역할을 하던 정교회가 없이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십자군 전쟁이 중세 후기 선교의 특징이 된 극단적인 공격적 선교이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수호한다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십자군은 오히려 형제교회들이 위축되게 만들었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또한 극단적 공격적 선교인 십자군은 기독교와 이슬람 두 진영에서 강력한 근본주의가 자라나는 토양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공격적이고, 가장 많은 재물과 인력이 소요가 된 십자군 전쟁의 지역은 결국에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잃어버리는 지역이 되었다. 교회들 간의 협력이 없이 진행되는 공격적인 선교의 열매는 당장은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회복시켰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일시적인 확장일 뿐이며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던 극단적인 공격적 선교에 반하는 모습들이 십자군의 마지막 시기에 등장하였다. 십자군 막바지였던 13세기에 서방교회의 대표적인 두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이다. 이 두 선교회를 통해서 이슬람과 십자군의 전쟁 지역 너머의 공간에 선교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아시시의 프란시스는 폭력적인 공격적 선교의 흐름 속에서 반대의 소리를 내고 있는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는 기도로 유명하다. 십자군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프란시스는 오히려 철저한 명상의 삶과 복음전파의 삶의 조화를 강조하고, 행함으로 설교하라 주장하였다. 즉, 평화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제일 앞에 서서 교회의 욕망을 내려놓는 섬김과 사랑의 행함으로 말이 아닌 삶으로 설교하였다.
그 결과 5차 십자군 전쟁 때에 프란시스는 전쟁이 한창인 곳으로 나아가 결국 술탄 앞에서까지 복음을 전하였고, 그 복음을 들은 술탄은 프란시스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일화가 전해진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단순하게 평화를 외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평화의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수도원을 도시의 삶으로 가지고 왔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들은 복음을 삶으로 살아가면서 열정적으로 헌신하였다.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청빈, 순결, 순종의 3대 덕목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그들이 머무는 수도원들은 인근 주민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되었고, 복지의 장소가 되었다.
더불어서 선교에 대한 열정은 시리아 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담당했던 아시아 지역의 선교의 열정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예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인 몬테코르비노의 존(John of Montecorvino)를 들 수 있다. 그는 1294년 북경에 도착하여 성공적인 선교의 열매를 맺어 1305년까지 6,0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1328년 그가 사망하자 교회와 그의 선교 사역의 한 축이었던 학교도 약화되었다.
이 시대의 선교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특수성의 선교이다. 실질적으로 복음을 공격적으로 전하려는 시도가 십자군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분열과 다툼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공격적인 선교의 한복판에서 피어난 섬김과 삶의 선교는 오히려 약하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선교의 열매를 맺어가며 그 지경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던 지역을 지키는 선교가 됨과 동시에 그것을 기반으로 확장이 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공격적인 선교와 방어적 선교. 이 두 패러다임은 현재의 교회 선교 속에서도 언제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