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오토바이와 베트남 생활

베트남은 오토바이 천국이다. 전 세계에서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오토바이가 많은 나라가 베트남이다. 한국의 도시화율이 90%를 넘어선 것과 달리 베트남은 아직도 35%를 상회하는 수준이라 도로 환경이 열악하다.


전에도 언급했듯 베트남에서 오토바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렵다.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 벌 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오토바이 행렬로 인해 길을 건널 수도 없어 머뭇거리며 바라보던 그 광경은 참 낯설고 불편했다. 가끔 뒷좌석에 어린아이들까지 온 가족을 태우고 주행하는 모습이며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많은 짐을 싣고 달리는 그들이 위태롭고 또 신기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토바이 위로 그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리고 가냘파 보이는 젊은 직장 여성은 하이힐을 신은 채 달리는가 하면 길거리 음식 장사를 하는 이는 불이 피워진 화로와 큰 솥을 오토바이 뒤편에 통째로 매어 달고 달리기도 한다.

더운 베트남에선 짧은 거리라 할지라도 따가운 땡볕에 도로를 걷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서 웬만해선 걷지 않고 오토바이로 움직인다. 요즘 같은 날씨엔 더위에 지친 노동자들이 나무 그늘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그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오토바이 위에 그들의 삶이 달린다고 표현하고 싶을 만큼 오토바이는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과 뗄 수 없는 풍경이다.

오토바이는 기동성이 있어서 출퇴근 시 정체로 이어지는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차량 사이를 요리저리 피해 가며 원하는 목적지에 좀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과 함께 저렴한 유지 비용 그리고 주차하기에도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골목길이 많은 베트남과 같은 저개발 국가의 도로 상황에서는 오토바이가 여간 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편리성과 경제성에도 불구하고 오토바이는 사고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오토바이 특성상 2바퀴로 달리다 보면 도로 곳곳에 움푹 패인 웅덩이를 만나거나 모래가 깔려있는 미끄러운 곳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가는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자전거로 시작해서 중고등학생이 되면 대부분 전기자전거로 이동하고 대학생이 되면 오토바이를 타게 되는 베트남 대부분의 사람들도 사고는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학교에 오가는 길에 바로 목전에서 접촉 사고가 나는 순간을 어렵지 않게 목격하곤 하였다. 물론 시내 주행에서는 속도를 많이 내지 않기에 대형 사고가 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여전히 주변 지인들을 보면 크고 작은 사고를 경험하곤 한다.

우리 부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베트남에서 지내면서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4년여 동안 두 차례 이런 경험을 하였고 우리 부부의 다리와 손에는 영광(?)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 혹자는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를 탄다고 하니까 우람한 배기통 소리와 함께 멋진 선글라스를 쓰고 가죽 잠바를 입은 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연상한다면 오해도 한참 오해이다.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이 타는 오토바이는 실상 스쿠터라고 부르는 배기량 100cc 내외의 이동 수단이다.

최근 사이공 타임스(The Saigon Times)는 베트남에서 새롭게 시행될 오토바이 제한 정책에 대해 보도했다. 2025년까지 깨끗하고 정돈된 도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대중교통 및 운송 인프라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수도 하노이는 12개 지역과 3개의 주요 도로에 오토바이 금지령을 우선 적용하려 한다. 이후 2030년부터는 하노이 전 구역에서 오토바이 운행과 진입을 전면 금지할 예정이다.

현재 베트남은 매연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교통체증이 심각한 상황이다. 그에 비해 버스 노선은 전체 수요의 약 31%에 불과해 도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중교통이 필요하다. 오토바이 금지령은 2017년에도 대기오염과 교통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제한 정책을 제안했지만, 대중들의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

정책을 발표한 지금도 여론의 거센 반대와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베트남 정부는 “환경오염과 혼잡한 도로 질서를 완화하고 대중교통 이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오토바이 제한이 꼭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선교지에서 삼중고
35년 전 신학대학 졸업과 군 복무를 마친 후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던 중 졸업 논문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작은 섬에서 전임목회를 시작했었다. 전북 지역 조그만 섬교회에 총각 전도사로 부임하여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가장 친한 친구 어머님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1박 2일에 걸쳐 서울까지 가서 인사를 나눈 후 시간이 조금 흘러 아내가 당시 목회하고 있던 섬교회를 서울에서부터 방문하였다. 가끔씩 만나면 내가 말하는 섬교회 이야기를 설마설마하며 확인차 왔던 것 같다.

1월 초 차가운 날씨에 그날따라 파도가 심해서 여객선이 사역하던 섬까지 당도하는 게 기적처럼 여겨지던 순간이었다. 근처에 좀 더 큰 섬까지는 여객선이 당도했지만 정작 우리가 가야 할 끝 섬까지는 위험해서 갈 수 없다고 한다. 그곳에서 어렵게 수소문하여 조그만 보트를 이용하여 사역지 섬까지 위험을 무릅쓴 항해를 하였다. 당시는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배에 있던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서 파도를 너울처럼 타며 간신히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위기의 순간에 우리 부부가 함께 나누었던 말씀이 시편 107편 23절 이하의 말씀이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때 아내는 선교지라는 곳이 어떤 곳이며 앞으로 사역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일들임을 피부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60살이 넘어 베트남 땅에서 남편 선교사의 곡예 같은 오토바이 운전을 등 뒤에서 매 순간 견디며 지금까지 함께 해 오고 있다.

지상 마지막 낙원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뉴질랜드에서 목회하는 동안 지진과 총기 난사 현장도 경험하였고 교민 중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와 암으로 이 세상을 먼저 떠난 많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히 안전한 곳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플 때 병원 가는 것,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 현지인들과의 언어소통에서 오는 한계를 매 순간 절감하고 있다.

해외 생활을 뉴질랜드에서 시작한 교민들도 이민 초창기에 한 번쯤은 겪었을 어려움들이다. 다행히 대부분의 이민은 더 나은 선진국으로 이동하다 보니 위에 언급한 어려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는 선교지에서는 삶이 버거운 것은 사실이다. 가족들을 챙기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병든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지만 자주 나가볼 수 없고, 사역지를 오래 비워두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떨어져 있는 자녀들을 한번 만나는 것도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더 나를 짓누르는 것은 내가 혹은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하는 이 일들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물론 복음 사역을 이윤을 추구하는 비즈니스 기업들이 하듯이 수치나 물량으로만 계산할 수 없지만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그런 잣대를 전혀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칫 내가 한 것 이상으로 포장하고픈 욕구가 생기고 나중에는 본질과는 상관없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모습에 소소라치게 놀라곤 한다. 그럴 때마다 첫 목회지 낙도에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해 주시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하늘 아버지에게 오늘도 마음을 향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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