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 기념 단편 소설

발그림자

“혜자가 자넬 찾아. 지금 병원에 있고.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지만. 속히 올 수 있나? 나도 자네랑 같이 가고 싶네.”

자동 응답기에 남겨진 한스의 목소리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여보, 한스가 어서 오래. 장 할머니가 아픈가 봐.”

요한은 아내에게 전화 응답 내용을 말하고는 어스름 추위에 혼자 떨고 있을 아내를 위해 전기히터를 켰다. 요한은 부지런히 자동차로 달려가 사 온 물건을 주방으로 날랐다. 마음만 급할 뿐 몸은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내는 화장실에서 나와 서두르는 요한의 눈치를 보았다.

“여보, 나 추운데 따뜻한 차 한 잔 줘, 아니, 이렇게 비 올 때는 인삼차가 더 좋은 것 같아. 여보, 차 한 잔 부탁해요.”

아내는 요한이 장 할머니에게 가서 늦게 오는 것이 싫었다. 어두워질수록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윤지는 남편이 천천히 갔다가 빨리 오기를 은근히 바랐다.

“여보, 가위가 어디 있지? 인삼차 봉지가 잘 찢어지지 않네. 그리고 여보, 나 혼자 가라고 하지 말고 같이 가자. 나도 당신과 함께 있으면 좋은데.”

아내는 힘들어하면서도 일어나 가위를 찾아 주었다. 요한은 식탁 위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찻잔에 인삼차를 타서 아내에게 주었다.

“싫어요,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띵하고 난 도무지 가고 싶지가 않아요. 가려면 당신이나 혼자 갔다 오세요. 일찍 와요.”

요한은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물설고 낯설고 말까지 설은 이 작은 읍내에서 산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한 자신이야 일 때문에 왔다고 하지만 아내는 순전히 남편 하나 보고 온 것이 아닌가. 아내는 요즘 들어 부쩍 더 외로움을 탔다.

동네 이름은 스프링스 필드 지역이지만 낯선 이방인 부부를 대하는 스코틀랜드인의 태도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요한이 자기 마을에 부임해 온 새 담임목사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감히 백인이 사는 마을에 얼굴색 다른 이방인이 온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다 우리에게 설교할 목사라니, 아주 대놓고 싫은 기색을 하는 노인들도 있었고, 젊은이들은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때론 청년들이 탄 차와 나란히 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순간이면 요한이 동양인인 것을 알아채고는 놀리기도 했다. 이럴 때, ‘차 문을 열고 뛰어나가 싸워, 말아’ 하며 생각이 복잡해지면 아내는 금방 눈치채고 팔을 잡으면서 참으라고 말렸다.

요한은 자신이 목사라는 사실 때문에 의식적으로 참으려고 노력하지만, 감정조절이 잘 안될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부모가 있는 오클랜드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요한은 한스를 떠올리곤 했다. 요한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난, 처음에 우리 교회가 교단총회에 보낸 목회자 요청서의 답으로 보내준 자네의 서류를 보고 깜짝 놀랐네.”


요한이 당황하는 표정을 보이자 한스는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요한, 우선 내 말을 잘 들어보게.”

한스는 한참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마치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듯했다. 요한은 계속 긴장하고 있었기에 약간의 가슴 떨림과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 후 한스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가 보내준 서류를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은 자네가 한국 태생이었기 때문이야.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스코틀랜더가 개척하여 살았던 지역이지. 지금은 인구가 400명 정도밖에 안 되지만 세계 1차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약 5,000명 정도의 스코틀랜더가 살았지. 전에는 금광이다, 기찻길 터널 공사다 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몰려들었어. 그래서인지 이 지역은 아직도 강한 스코틀랜드 성향이 남아있어. 지금도 아침, 저녁으로 가끔 언덕 위에서 부는 백파이프 연주를 들을 수 있지. 그러나 마을의 경기가 점점 쇠퇴해지면서 교인들은 노령화되어 가고 있어. 이렇게 잘 지은 교회 건물도 소용없을 정도로. 요즈음은 말이야, 젊은 목회자들이 오려고 하지를 않아. 아니 왔다 가는 금방 가버리는 정거장 같은 곳이 되어버렸네. 목사 자리가 빌 때마다 내가 임시로 설교 정도는 하지. 주일에 한 번만 모이고 말이야. 항상 교회 문을 열어 놓아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말이야, 이번에 목회자 요청 서류를 총회에 내고 후보자가 없으면 아예 교회 문을 닫으려고 했네. 그런데 우리 목회자 청빙위원회는 두 번 놀랐네. 아니, 나는 세 번 놀랐네. 그 이유가 궁금하지.”

한스는 잠시 뜸을 들이며 요한의 표정을 살폈다. 굳어 있는 요한을 보더니 한스는 손을 위아래로 휘졌고 애써 웃음을 참으며 딱딱한 의자의 자리를 고쳐 앉았다.

“우선, 편하게 앉게. 형식은 지금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자네를 만나서 기쁘네. 교단총회에서 우리 교회에 올 목회자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반신반의하면서도 무척 기뻤네. 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심하지 않구나. 그것도 올해 목사 안수를 받은 젊은 부부라는 말에 우리는 더 좋아했지. 비록 떠난다고 해도 한 3년은 붙들어 둘 생각이었네. 우리 동네는 그나마 겨울 스키시즌이 되면 제법 활기가 넘치는 지역이라 경제적으로도 부족한 편은 아니지. 아무튼, 우리들은 자네 서류가 도착하기를 무척이나 기다렸네. 누구일까 하고 무척 궁금했거든. 총회에서는 누구라고 일체 말은 해주지 않고 그저 선입관을 버리고 잘 봐 달라는 말만 하는 거야. 그러니 더 궁금하지.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총회에 알아보았는데도 대답을 미뤄.”

한꺼번에 말을 많이 해 힘이 드는지 한스는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어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지원자가 스코틀랜더나 유럽피언이 아닌 아시안이라는 사실이었어. 아니 사실 당황했지. 기대와 호기심으로 누구지 했는데 아시안이라니. 실망이 아주 컸지. 화도 나고 무시당한 기분도 들고. 아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데. 용서하고 듣게. 바나나 같은 아시안이라니. 성질 급한 장로는 사진을 보고는 더 볼 것도 없다고 하고, 그래도 한쪽에서는 서류 내용이라도 좀 보자고 하고. 내가 진정시킨 후 일단 서류를 좀 보자고 했지. 실은 나도 이미 마음은 떠나 있었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내가 평생을 목회하던 교회인데 아무리 후임자들이 들락날락한다고 해서 이젠 노란 아시안이라니. 용서하고 듣게. 나도 서류를 보고 싶었던 것보다 목회자 청빙위원회끼리 서로 다투니까, 시간을 좀 벌어서 조용해진 다음에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 된다고 내심 계산하며 대충 서류를 넘기는 척했지. 그런데, 자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거야. 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지. 내 눈에는 ‘한국’이라는 단어가 커다랗게 다가왔어. 한국이라니, 전쟁 통에 아무것도 없었던 황무지의 나라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지구의 가장 남쪽 나라 뉴질랜드 남섬의 이 동네까지 오다니.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니, 좀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한스는 요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스의 눈에서 강한 느낌을 받은 요한도 한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교회의 목사 연구실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공간도 멈추어 서 있었다. 낡은 양탄자와 책장에서 나는 곰팡내가 한스와 요한을 감싸고 있었다.

“자네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나?”

“아직 진짜 이야기는 안 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그럴 거야. 늙으면 말이 많아지지. 하고 싶은 말을 길게 다 하고 나면 항상 본론은 짧고 간단하지. 그건 그렇고. 자네 아내는 자네가 이곳에 지원한 것에 동의하나?”

“예에, 아니, 처음에는 막연하게 유럽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반대는 아니지만 신중히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도. 제가 가겠다면 본인도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한스가 잠깐의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네와 같은 젊은 아시안 부부가 스코틀랜드 전통이 강한 이 지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스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강조해 말했다.

“글쎄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뿐입니다.”

요한은 한스의 표정에서 아무런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요한은 한스를 조금 더 두고 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정했다.

“우리 목회자 청빙위원회에서는 자네를 청빙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내게 위임했네. 우선 자네가 원하는 주일에 와서 설교를 한번 해 주게. 가능하면 노인들이 많으니까, 힘 있는 설교가 도움이 될 거야. 너무 그렇게 굳어질 필요는 없네. 힘을 내게.”

요한은 잠시 멈추어 있던 교차로에서 힘 있게 엑셀 라이터를 밟았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곧 비바람이 요한이 가는 길 앞으로 달려왔다. 서서히 비안개가 깔리며 요한의 차를 에워쌌다.

점차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이내 우박으로 바뀌었다. 넓은 들녘에서 천둥소리와 번개가 번갈아 지나갔다. 요한은 73번 도로를 따라 달렸다. 비 맞은 마을이 한스와 함께 마중을 나왔다. 한스는 늘 작은 가방을 들고 다녔다.

“어서 오게. 생각처럼 늦지는 않았군. 이 조그만 마을에서도 자네 찾기가 쉽지가 않군.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나 혼자 운전할 수도 없고 해서. 자네 도움이 필요했네.”

“한스, 그래도 제가 어디에 갔었는지는 묻지 않는군요. 궁금할 텐데요.”

“아닐 세. 그건 자네 개인적인 일이니, 내가 묻기는 뭐하지. 그런데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가?”

“아내의 건강 정기점검 일이었어요. 쇼핑도 하고 드라이브도 좀 하고 왔지요.”

“자네는 아내에게 참 잘하네. 나는 그러지 못했지. 마누라 죽고 나니 더 생각나는 거야. 이거 더 울적해지네. 어서 가세.”

“한스, 아내가 당신에게 주라고 보온병에 차를 담아줬어요. 인삼차예요.”

“그래, 좋지. 나는 녹차보다는 인삼차가 좋더라.”

“인삼차는 원기 회복에 그만이지요, 우선 차부터 마시고 갈까요?”

요한은 시동을 걸어 둔 채 한스에게 인삼차를 따라 주었다. 앞 유리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환기 스위치를 누르자 앞 유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나 장가 좀 보내줘. 외로워서 힘들어.”

“장 할머니는 어떻게 하고요?”

“누구, 혜자? 말도 꺼내지 마. 지금도 맥이 떠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충격이 너무 컸나 봐. 그래도 혜자는 잘 적응하고 있는 거야. 한국인은 잘 참는 것 같아. 인내심이 대단하거든.”

“그렇죠. 한국인의 참을성은 특별하죠.”

“자네도 그래?”

“제가요? 저는 잘 참지 못하는 편인데요. 전 부모님의 참을성과 인내심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안 그래. 유럽인으로 보면 자넨 잘하고 있어.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뭐랄까, 우리 부모 세대들이 보여주던 참을성을 보여주고 있어. 자넨 목회도 잘하고 있잖아. 후원자들이 많아.”

“정말이요? 저는 배타적이라고 느꼈는데요. 쌀쌀맞고 무뚝뚝하고 정도 없고 말이에요.”

“아주 불만이 많았던 것 같군. 그래도 좀 더 참고 있으면 마음을 활짝 열고 자네를 받아들일 거야. 나도 여기 부임해 와서 자네와 같은 배타성을 느꼈네. 나는 선조가 스페인에서 건너온 네덜란드인이잖아. 세상 말로 나도 처음에는 거리감을 느꼈지.”

“그러고 보니, 한스나 나나 이들에게는 여전히 이방인이군요. 그래도 한스는 같은 유럽인이라 좀 낫지 않을까요?”

“그럼, 자네도 중국인, 일본인 같은 동양인이라고 해서 좀 낫나? 안 그렇지. 사람은 피부 색깔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면 서로 서먹한 거야.”

요한은 한스의 말에 동의하면서 ‘차 다 마셨으면 갈까요?’ 하는 몸짓을 해 보였다. 한스는 남은 차를 끝까지 다 마시고 뚜껑을 닫았다. 요한은 금방 생각이 났다는 듯이 한스에게 말했다.

“올해도 가평 전투 기념식에 갈 거예요?”

“아니, 올해는 안 가려고. 혜자가 힘들어 할 것 같아서. 가 봐야 맥 생각밖에 더 나겠어? 다들 살아 있는데 올해는 그 자리에 맥이 없잖아.”

“한스, 저는 가평 전투에 대해 모르는데 그 얘기 좀 해주세요.”

“요한, 자네는 잘 모를 거야. 그리고 보니까, 한국전 참전용사 소식지에 실린 기사를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야.”

한스는 가방 안에서 작은 책자를 요한에게 주었다. 요한은 기사를 살펴보았다.

“지난 4월 22일 가평읍 대곡리에 있는 영연방 참전 기념비 앞에 6.25 당시 가평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한 전몰장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 유엔본부, 뉴질랜드, 호주, 영국, 캐나다를 포함하는 영연방국가 대표와 가족 등 약 400명이 모여 가평 전투 기념식이 열렸다.”

요한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가평 전투에 대해 간단히 적혀 있었다.

“1951년 4월 23일 밤 10시경 중공군이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 인해전술로 남하를 계속하다가 가평 북방 8km 지점의 가평읍 목동리와 대곡리의 504고지를 따라 영연방 소속의 27연대의 2천5백 명이 만든 저지선에서 남하하는 중공군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4월 24일 아침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했는데 미군의 탱크와 공중폭격의 도움으로 1만여 명 이상의 중공군이 죽거나 다치고 연합군은 1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뉴질랜드군도 가평 전투에서 천여 명의 중공군을 죽이고 3천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성과를 얻었다. 뉴질랜드군도 40여 명이 한국전에서 죽었다.”

“한스, 가평 전투는 어떠했나요?”

“가평 전투라, 나는 최전선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최전방에 늘 있기는 했지. 가평전투는 말이야, 전쟁은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야. 내 영혼에도 아직 전쟁의 상처가 있어. 인제 그만 얘기할까?”

“한스 당신은 참 정도 많고 사려심이 깊은 사람이에요. 제가 스승은 제대로 만난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하지만, 나는 전쟁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참한 지를 내 눈으로 똑똑히 봤네. 불쌍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어. 한국전에서. 사람은 자고로 겸손해야 하네.”

요한은 다시 73번 국도로 들어섰다. 차는 사거리를 지나 병원으로 찾아들었다.

장 할머니.
요한은 장 할머니를 볼 때마다 자기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부모님을 따라 이민 오기 전에 본 할머니의 모습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그 느낌이 좋았다. 장 할머니는 요한이 목회자 청빙위원회의 요청으로 교회에 설교하러 왔을 때 만났다. 그날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기억에 선명했다.

요한과 아내는 주일 하루 전에 목사관에 도착하여 썰렁하고 딱딱한 침대에서 밤을 지내고 엉성한 아침을 먹고 목사관을 나왔다. 뜻밖에도 현관 앞에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과일 바구니에는 한글로 쓰인 작은 카드가 꽂혀 있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힘내세요.”

아내는 눈물을 보였고 요한은 아내의 손을 힘껏 잡았다. 그날, 그러고도 아직 예배 드리기에는 이른 시각이라 요한은 아내의 손을 잡고 읍내를 한 바퀴 돌고 공원을 지나 멀리 보이는 눈 덮인 남쪽 알프스를 보았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설교내용을 모두 외우려고 노력했지만,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조바심하면서 설교원고를 준비했다. 그날 예배는 아주 전통적으로 푹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고 나이 든 성도들은 호기심으로 강단에 선 요한을 힐끗힐끗 살펴보곤 했다. 예배를 집례하던 요한은 틀리지 않으려고 자꾸 순서지를 보았다.

몸이 점점 더 굳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요한은 좀처럼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다. 기도가 끝나고 설교를 시작하려고 할 때 한 동양 할머니가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요한은 저 할머니가 한국에서 온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밤새 외운 설교내용이 잘 생각나지도 않았고 준비한 원고도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머릿속에서 저 할머니가 한국 사람인가를 생각하다가 남은 설교를 끝냈다. 예배가 끝나고 작은 홀에서 다과를 나누었다. 한스는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인도하여 요한 부부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혜자 도슨 부인이야. 그리고 여기는 요한과 그의 아내이고.”

요한은 혜자라고 해서 일본인인 줄 알았다. 한스는 요한의 아내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요한이 인사를 하려고 손을 내밀자 도슨 부인도 손을 내밀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장혜자라고 합니다. 여기 오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여기서 한국 사람을 만나다니. 더구나 목사님으로 오시고, 기적 같은 일이에요. 우리 애 아빠가 오늘 이 자리에 있었다면 너무나 좋아했을 거예요.”

장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한은 아내와 얼굴이 마주치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을 본 것처럼 놀랐다. 벌어진 아내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한스는 웃음을 띠며 한국인의 상봉을 즐기고 있었다.

예배가 모두 끝나고 한스는 요한과 아내를 스코틀랜드 식당으로 초대했다. 한스가 축복기도를 하고 함께 나눈 만찬은 짧게 끝났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한스는 식사가 끝나자 요한의 아내에게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요한은 교회와 교단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교단총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장 할머니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당분간은 참기로 했다.
아버지의 조언대로 한인 목회를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뉴질랜드에서 목사가 되었는데 자연스럽게 현지인과 더불어 살면서 목회하고 싶은 생각이 더 강했다.

목사 안수를 받고 임지를 기다리는 동안에 요한은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부모님들은 첫 손자를 보게 되었다고 기뻐하셨지만, 요한은 한편으로 기쁘면서도 앞으로의 진로가 불투명하여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한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클랜드에서 군종 목사 모임이 있어서 왔다면서 잠깐 보자고 했다. 한스는 곧바로 파넬 로즈 가든으로 알려진 도브 마이어 로빈슨 파크로 가자고 했다.

<영원히 기억하리>

화강암에 새겨진 한글이 있었다.

“요한, 저 돌은 한국의 가평에서 가져온 거야. 우리 뉴질랜드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을 맞아 싸우던 곳이지. 이곳에서 해마다 한국 종전 기념식이 열리지. 가평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먼저 죽은 전우들의 희생을 기념하면서 말이야. 나도 가끔 한국 종전 기념식에 참석하곤 했지. 맥과 더불어 말이야.”

한스는 요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와의 만남 이후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이 많았네. 그동안 많이 혼란스러웠지. 우리 목회자 청빙위원회에서는 자네가 오는 것을 반대했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세상사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 나도 교회가 반대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네. 서로가 사는 합리적인 방법이지. 그래서 그렇게 결정하기로 했지! 그러나 뭔지 모르지만, 서운한 것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네. 교회에서도 교회 문을 닫는 것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들을 한 것이지. 교회 문을 닫으면 우리가 모두 죽는 것과 같은 거라는 위기감까지 든 거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목회자는 전혀 없고 우리들은 죽어가고 새로운 사람들은 교회에서 멀어져만 가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게 됐지. 그래서 목회자 청빙위원회는 다시 한번 교단에 연락해 보기로 했네. 그런데 답장이 없었어. 서로 좀 더 생각해 보자는 것이겠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에 내가 청빙위원들에게 한국전에서 있었던 일들과 맥과 혜자 이야기를 좀 했지. 그래도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고, 그랬더니 모두 목회자 문제는 나에게 일임을 했네. 나는 말이야,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고향교회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전쟁에 나가게 됐지. 1950년 12월10일 웰링턴에서 출발하여 같은 해 12월31일에 부산항에 도착했었네.”

한스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닷바람이 어스름 추위를 느끼게 했다. 한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한국은 정말 춥더군. 때때로, 눈도 많이 오면 길은 진흙탕이 되어 군화는 자꾸 미끄러지고, 때론 뉴질랜드의 7월 겨울의 눈길을 걷는다는 착각도 하곤 했지. 폭탄 터지는 소리만 없다면 말이야. 나는 한국전이 휴전한 이듬해인 1954년 10월에 뉴질랜드군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 함께 돌아왔네. 그리고 그 후부터 지금까지 여기 스프링스 필드에서 살았지. 한국에서는 혜자 남편 맥과도 잘 지냈지. 지금은 그도 가고 없지만.”

한스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요한도 한스를 따라갔다. 한스는 ‘빛나는 바닷물’이라는 와이테마타 항구를 바라보았다. 요한도 한스를 따라 항구에 시선을 두었다.

“자네가 좀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게. 내게도 시간이 필요하네. 자네도 혜자 이야기가 궁금하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그러면 또 보세.”

한스는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요한의 말을 정중히 거절하고는 택시를 타고 떠났다. 교단총회의 목회자 파송위원회에 낼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요한은 제2, 3의 후보지 요청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막연하지만 스프링스 필드의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면서 요한은 스프링스 필드에서 요청이 오면 가겠다는 아내의 동의를 얻어 보고서에 사인했다.

요한은 결정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한국에서보다 뉴질랜드에서 산 세월이 더 많았는데도 자신은 뉴질랜드 키위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온전한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겉으로 볼 때는 한국인이지만 요한 자신이 배우고 익숙해진 삶은 뉴질랜더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백인들은 언제나 동양인으로 보았다.

요한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취직이 안 되었다. 어느 곳에서도 뽑아 주지를 않으니, 아니, 기다리는 끈기가 약해서 포기해야 했다. 상처와 좌절감을 안고 방황하던 끝에 대학원에서 목사 후보생이 되어 안수까지 받았지만 아직 갈 데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아내와 가정에 대한 부담감은 커졌다. 아직 부모에게 의지하고 기대려는 마음이 더 크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러던 중에 한스에게서 소식이 왔다.

‘요한, 잘 있었나? 나 한스일세. 요즈음 어떻게 지내나? 특별한 일 없으면 자네 아내와 함께 한번 내려오게. 혜자가 기다리네. 나도 물론 환영하고. 또 보세.’

한스는 전화 대신에 카드를 보냈다. 한스는 요한에게 항상 쾌활하고 즐겁게 대하지만 그 속에는 남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가 배어 있었다. 요한에게는 한스의 태도가 정이 잘 가지 않는 거리감 있는 배려였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요한에게는 눈 덮인 남쪽 알프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요한은 그 산자락에 붙어사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비행기로 오클랜드에서 크라이스트처치에 내려 요한은 임신한 아내와 차를 빌려 73번 국도를 타고 68km를 달려 다시 스프링스 필드로 갔다. 서해로 빠지는 73번 길은 강과 들녘을 번갈아 만나고 지나가면서 멀리 눈을 이고 있는 높은 산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키 시즌이 끝난 동네는 다시 평온함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73번 국도를 오고 가는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곤 했다.

요한과 아내는 한스가 기다리는 교회로 먼저 갔다. 요한은 마음속에서 조바심이 났다. 한스의 말을 들을 때면 여간 주의해서 듣지 않으면 의미를 놓쳐버려 당황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고 지루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한참 동안 이어지더니 한스는 목회자 청빙위원회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의미와 상징으로 사용하는 단어들로 표현된 말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요한은 한스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진 못했지만, 면접이 매우 긍정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혜자,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요한과 윤지가 왔어.”

한스가 요한 부부를 장 할머니 집으로 안내했다. 장 할머니는 날씨가 좋아서인지 이 동의자 없이 불편하지만 움직였다. 아내가 먼저 장 할머니에게 다가가 포옹을 했다. 요한도 아내를 따라서 장 할머니를 살며시 안는 시늉을 해 보였다. 장 할머니는 요한과 아내를 위하여 밥과 더불어 여러 가지 나물들을 준비해 주었다.

“이것은 고사리고, 질경이 무침, 민들레 무침, 야생 부추전이고, 이것은 호박 말린 것이고 그리고 양배추 겉절이.”

장 할머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한 식탁이었다. 아내는 장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 불편한 몸으로 이렇게 준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꿈만 같네요. 이런 곳에서 나물을 먹을 수 있다니요.”

“그런데 김 목사님은 생각보다 얼굴이 밝지 않네요. 이곳보다 좋은 곳에 가기로 했나요.”

혜자는 메노라에 불을 붙이고 기도를 했다. 밥을 먹던 요한은 눈을 들어 장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장 할머니는 한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래, 자네가 이곳에 오고 싶다면 환영하기로 했네. 혜자도 이곳에 와서 사는데 왜 자네라고 해서 못 오겠나? 나도 실은 이곳 사람들이 보면 이방인이었지. 나는 이들과 생김새가 비슷해서 그나마 나았고, 자네는 얼굴이 아주 딴판이니 힘은 좀 들 걸세. 그래도 자네가 노력해 봐. 안 그런가? 자아. 우리 축배를 드세. 역사적인 한국인 목사의 부임을 위하여.”

한스는 포도주가 들어가자 얼굴이 금방 붉어지며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기 사진 속에 있는 맥 말이야. 저 친구는 참 좋은 친구지. 저 친구의 고향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 미저리 산 너머의 아서스 패스라는 곳이야. 우리 할아버지는 여기에서 가까운 점프업 포인트에서 서던 알프스를 뚫는 기찻길을 위한 터널 공사 인부였고 맥네는 저 산 너머의 아서스 패스에 있는 오티라 터널에서 일하는 광부였지 맥의 아버지는 프라하에서 태어난 아쉬케니지였는데 1910년대에 팔레스타인으로 못 가고 이곳에 자유를 찾아 이민을 와서 터널 공사장으로 흘러들어갔었다네. 터널이 완공되고는 뿔뿔이 흩어졌지마는. 맥네는 주저앉은 거야. 우리는 크라이스트처치로 옮겨가고.”

생각에 잠긴 한스는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시더니 장 할머니를 보고 말을 이었다.

“나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있다가 더니든에 가서 군종 목사가 되었네. 맥도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4천 6백 명과 함께 부산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만난 거야. 우리는 서로 다른 배를 타서 처음에는 몰랐거든. 나중에 야간천막에서 드리는 예배에 나왔지. 고향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유대인인 걸 알고 가까워졌지. 맥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어. 부산진에서 나중에는 가평까지 올라갔지. 한국의 추위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 내게 제일 힘든 일은 화장실이었어. 우습게 들리지만 추운 겨울에 웅덩이를 파고 볼일을 보는데 잘 안돼. 결국, 변비로 고생을 좀 했지. 맥은 한겨울에 참호를 파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하더군. 겨울 추위는 몸서리치게 춥고, 나는 말이야, 전쟁 중에 보았던 수많은 아픔과 상처들을 기억하고 있지.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고 말이야. 길가에 버려진 아기와 아이들, 죽은 사람들. 그런데 말이야, 그때 나는 따뜻한 홍차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나도 전쟁 중에 가평, 평택, 의정부의 부대를 따라다니며 야외 예배를 인도하곤 했지.”

한스를 통해 듣는 한국전쟁 이야기는 늘 낯설었다. 요한은 두려웠다. 전쟁의 아픔에서 벗어나 뉴질랜드에 이민을 왔는데 이곳에서 숨겨둔 한국전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요한은 텔레비전에서 본 6.25 동란 특집 다큐멘터리를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전쟁이 무섭다는 요한의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전쟁에 관련된 말들이 요한의 마음에서부터 떠올랐다. 한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요한의 머릿속은 한스의 말보다 그 때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전쟁 모습이 더 크게 채워졌다.

아내가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요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스는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장 할머니에게 맥과 만난 이야기를 요한과 아내에게 해주라고 했다.

“저 영감이 말한 대로 맥을 청평에서 만났어. 나는 그때 일요일이라 천막 교회에서 반사를 하고 있었는데. 눈이 펑펑 오는 오후에 미군 트럭이 오더니 이것저것을 내려놓는 거야. 군에서 가져온 구호물자였는데 목사님이 받아서 교인이랑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지.”

요한과 아내는 장 할머니의 이야기로 눈을 돌렸고 한스는 조용히 포도주잔을 기울였다.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장 할머니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그때 전쟁이 나서 고향에도 못 가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군인들이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까지 올라갔다는 말에 겨우 고향에 갈 엄두가 났어. 우리 집은 북한강과 만나는 31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조종천이라는 큰 내가 나오고 거기서도 더 들어가면 현등산 아래 현등사라는 큰 절 근처에 있는 보리울이라는 곳이야. 내가 맥을 따라서 여기까지 온 것은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가 않아. 그래도 와서 보니까 우리 고향과 비슷한 곳이 있더라고. 높은 산에 둘러싸인 것 하며, 내가 있고 강이 만나고 기차역까지 있으니. 처음 눈 덮인 이곳에 와서는 기차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지금 내가 어디에 있나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지금도 기차 소리를 들으며 한참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장 할머니는 자꾸 마시는 한스의 포도주잔을 내려놓으며 요한과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닌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요한과 아내는

‘아니에요, 듣고 싶어요. 더 이야기해 주세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젊은 목사님이 한 많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그리고 그러니까,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지? 한국말을 한참 만에 하니까 말이 생각나지를 않네. 우리 부모님은 현등사에서 일하며 먹고 살았는데 서울의 잘사는 신도네 집에 아이 봐 줄 여자가 필요하다며 나를 보낸 거야. 전쟁 나기까지 함께 살다가 전쟁이 나니까 나를 귀찮다고 버린 거야. 어린 나이에 얼마나 그 상처가 크던지. 삼촌네가 있는 청평에 간 거야. 삼촌은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 미군 부대에 잡역부로 일했어. 맥이 나를 눈여겨보는 것을 알고 삼촌은 나를 맥에게 소개해 주었지. 백인은 다 미군이려니 했는데 맥은 공산군을 막기 위해 유엔군으로 뉴질랜드에서 왔대. 나는 백인이라서 싫다고 했지. 그랬더니 자기는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은 중동에 있어 우리는 형제 국가라고 하면서.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지만. 하루는 삼촌이 맥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줬어. 맥은 뉴질랜드 남섬이라는 데서 왔는데 겨울이면 우리 동네하고 비슷하다. 산은 더 크고 높지만, 그런대로 고향 같은 느낌이 든다. 맥은 홀로코스트에서 고아가 되어 이탈리아를 거쳐 온 검은 머리 마리아를 좋아했는데 내가 마리아하고 분위기도 비슷하다. 그래서 너하고 사귀고 싶다고 했다고 말이야. 그래도 나는 무조건 싫다고 했지. 삼촌은 한 번만 만나보면 선입관이 없어질 거라면서 자꾸 종용했고 나중에는 삼촌 집에 얹혀사는 것도 미안하고 해서 삼촌을 따라서 부대 앞에서 만났어. 어차피 영어는 못하니까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오면 되겠지 하고 말이야. 참 순진한 거지. 한번 만나고 나니까 집으로 교회로 막 찾아오는 거야. 혜이자, 혜이자 하면서 말이야. 그때는 다 큰 처녀가 백인을 만나면 양색시라고 했잖아요. 나는 그게 싫은 거야. 그래도 시간만 나면 먹을 것도 갖다주고 선물도 주고 하면서 나를 찾아왔어. 그러다가 그 해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 때는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선물도 한 가방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나눠주니 얼마나 아이들이 좋아들 하던지. 그래서 그때, 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다 했지. 이런 내 이야기가 우습겠지만.”

“아니요,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요한과 아내는 마음을 모아서 대답했다. 조금 위안을 얻었는지 장 할머니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이야기를 덧붙였다. 한스는 안락의자로 가 졸기 시작했다. 밖에는 밤이 깊고 푸르게 익어갔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다는 말이 돌고, 휴전한다고도 하고, 전쟁이 더 길게 간다는 소문도 무성하며 어수선할 그때에 맥이 어느 여자를 데리고 집에 찾아온 거야. 양장한 여잔데 얼마나 세련되고 멋이 있던지. 나는 시골 소녀였잖아요. 그래서 나는 맥이 저 여자와 결혼한다고 말하려고 온 줄 알았어. 자랑하려고 말이야. 네가 관심이 없으니까 이 잘난 여자와 결혼한다고. 알고 보니 통역하는 여자였어. 나하고 같은 또래인데 언니같이 보여서 난 기가 죽었었거든. 여자는 맥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줬어. 여러 가지 얘기를 했는데, 곧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은 휴전한다. 전쟁이 끝나고 자기는 곧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데 내가 자기와 결혼해 준다면 더 남아 있다가 결혼하고 나서 함께 가고 내가 싫다고 하면 연장근무 안 하고 떠난다. 그리고는 나보고 결정하라고 하고선 가 버리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기만 있었지.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해서 삼촌에게 말했더니 듣고만 있다가 알았다고 말하는 거야. 내 생각엔 삼촌이 맥에게 조용히 떠나라고 할 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는 거야. 삼촌의 말을 듣고 맥은 연기 신청을 하고 나만 기다리는 거야. 참 우습지. 교회에서 결혼식 올리고 여권 나오는 동안 용산 근처에서 살다가 큰 애 낳고 둘째 임신해서 한국을 떠났어. 둘째는 일본에서 유산했고. 한국을 떠난 마음의 충격이 너무나 컸나 봐.”

장 할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한참을 말을 못 했다. 눈이 충혈되었다. 그리고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더니 이야기를 마치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쿄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방콕을 거쳐 시드니에 가서 그곳에서 정착해 보려고 했는데 시드니가 동양인에게 배타적이라고 느낀 맥이 나에게 미안하다면서 자기 고향에 가면 가평하고 닮은 데가 있으니 마음 붙이고 살자고 말하되. 그때는 왜 그렇게 서럽던지. 우리는 다시 짐을 꾸려서 오클랜드로 와서 쭉 살았어. 와서 보니까 먼저 뉴질랜드 군인하고 결혼해서 온 한국 여자가 있어. 우리는 얼마나 반갑던지. 그이의 남편은 영국 사람인데 시드니에 살러 갔다가 우리처럼 오클랜드까지 온 거래. 나는 오클랜드에서 둘째 딸을 낳았어. 정붙이고 살 만하니까 맥이 고향으로 가자고 하대. 자기는 도시가 안 맞는다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요한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내는 흐르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훔치고 있었다. 임신한 아기를 유산했다는 대목에서부터 울고 있었나 보다. 장 할머니도 아내를 따라 한참을 울고 나서 고향에 내려온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살면서 마련한 짐들을 다시 정리하고 나는 갓난애를 안고 맥은 걷는 아들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웰링턴에서 내려 배를 타고 픽톤이라는 곳에 내려서,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크라이스트처치에 도착했어.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먼저 온 한스를 만나 그 집에서 며칠 지내다가 기차를 타고 맥의 할아버지가 뚫었다는 오트라 터널을 지나 아서스 패스에 도착했어. 도착하고 보니 정말,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 우리 동네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시부모님은 무척 당황해하셨어. 조그마한 동양 여자를 며느리라고 데려왔으니 그것도 전쟁 난 나라인 한국의 여자를 말이야. 시아버지는 무뚝뚝해도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데 시어머니는 투정과 짜증으로 일관했어. 보다 못한 맥이 부모님 집을 나와 셋집을 얻고 부모님 목장에서 일도 하고 관광 철에는 등산 안내도하고, 잡화점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조금씩 모으고 있는데 어느 날 한스가 우리 집에 찾아왔어. 아서스 패스에 채플을 고치는데 도와주겠느냐고, 그래서 둘은 다시 가까워지더니 맥은 한스의 영향으로 옛날의 신앙을 회복하고 나중에는 교회로 나왔어. 맥은 참 친절하고 다정다감했어. 아침에 먼저 일어난 맥은 따뜻한 홍차를 준비해 놓고 거실에 벽난로를 피워 놓고 내가 잠에서 깨어 기다리곤 했어.”

장 할머니는 벽에 걸린 맥의 사진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살면서 맥이 한 번도 크게 화를 내는 것을 보지 못했어. 왜 살다 보면 화나는 일이 없겠어. 그래도 맥은 화가 나면 혼자 조용히 공원으로 나가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산책하다가 돌아와. 가끔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울면 조용히 내 곁에 와서 꼭 안아 주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 내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노력도 하고. 장 보러 갈 때면 아무리 바빠도 꼭 따라와서 장바구니를 들어주고, 집안의 힘든 일은 모두 맥이 알아서 다 해주었지. 맥은 고지서 영수증이나 중요한 서류들을 잘 정리하고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조용히 처리하였었는데. 그렇게 자상한 맥은 고향 묘지에 묻혀 있어. 언제 나와 한번 가 보자고.”

요한은 장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 무척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외롭지 않으냐고 물었다.

“나, 외롭지 않으냐고? 나야 잊힌 존재지. 고향에도 부모님 모두 세상 떠나고, 형제들과 함께 산 적이 별로 없으니 남남 같고, 삼촌도 떠나가고. 나 죽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을, 아! 우리 아들과 딸, 아들은 결혼해서 지금 영국에 살고 손자와 손녀가 있지. 며느리는 백인이야. 잉글랜드 여자야. 은근히 나를 무시해. 딸은 사위를 따라서 시드니에 살고 있어. 딸은 아들만 둘이야. 지난해 맥의 장례식 때 모처럼 다 모여서 사진 한 장 찍었지. 바로 이 사진이야. 맥은 없고. 모두가 쓸쓸하게 웃고 있지. 나 죽으면 안 오고는 못 배길걸. 맥이 모든 상속을 내 앞으로 하고 나 죽으면 자식에게 분배한다고 했거든. 고향에 가면 시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땅에 지은 멋진 모텔이 하나 있어. 지금은 남이 관리하지만. 나 죽으면 아들이 와서 인수할 거야. 아이들을 아무리 한국적으로 키우려고 노력해도 이곳에서는 역부족이었어. 지금은 안부나 전하며 살지. 언제나 잘 있느냐는 말만 하면서 말이야.”

요한은 이미 잠든 한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는 장 할머니가 준비한 작은 침실 방에서 잠을 잤다. 허튼 꿈속에서 길을 잃다가 잠이 깼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선 요한은 밝은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장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요한은 장 할머니가 슬픔에 겨워 눈물을 삼키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조용히 곁으로 갔다. 인기척을 느낀 할머니는 살짝 웃으며 요한을 맞이했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먼데 벌써 일어났네.”

“아~예. 화장실에 가려다 불이 밝아 나와 보았지요. 그런데 할머니는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아~ 이것. 보면 모르나? 바느질하는 거야. 한번 봐.”

“우~와. 정말 대단하네요. 이거, 가만있어 봐. 뭐라고 하더라. 음, 밥상 위에 덮는 천인가요.”

“비슷하지. 그러나 이것은 조각보라고 해. 책 보따리도 되고 보자기도 되고. 여기서는 밤도 담고 잣도 담고는 했지만.”

“이렇게 작은 천을 모아 한 올 한 올 땀을 따서 이처럼 아름다운 보자기를 만든 거예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놀랍군요.”
“칭찬해 주니 고맙네. 이건 내가 한국 떠날 때 가져온 거야. 꼭 필요한 곳에 쓰일 거로 생각하면서. 이걸 탐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줄 만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거든.”

장 할머니는 붉은 실을 자르려고 가위를 집어 들었다. 무쇠 가위였다. 보기에도 무척 오래되어 보였다.

“할머니, 골동품인 가위를 아직 쓰시네요.”

“이 가위는 사연이 있어. 오빠가 전쟁 나기 전에 평양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다가 잠시 집에 왔었는데 시집가면 쓰라고 오빠가 쓰던 가위와 바늘 모음까지 주고 갔어. 여기 보면 ‘평양’이라고 쓰여 있을 거야.”

요한은 장 할머니 손에 든 가위를 불빛에 비춰 보았다. 가위가 서로 만나는 부분에 ‘평양’ 이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장 할머니가 이 가위를 수만 리 떨어진 이곳까지 가져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요한은 장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 가위 아내에게 주실래요.”
“그럼 주고 말고, 조각보도 윤지에게 줄 거야.”

“감사합니다. 할머니를 기억하면서 잘 보관할게요.”

“김 목사님을 보니 평양 간 오빠가 생각나.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만. 이 낡은 골무와 닳고 짧아진 바늘도 늙어가는 나와 비슷해졌어. 저 시커먼 가위만 그대로야. 이상하지. 전에는 막연히 불안하고 죽으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하고. 때때로 전쟁 꿈을 꾸고는 놀라서 깨곤 하지. 전에는 그럴 때마다 맥이 나를 꼭 안아주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멍하니 앉아 있곤 해. 한스가 맥의 역할을 하려고 하는데 나는 왠지 맥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그러지 못하고 있어. 맥 말이야. 작년에 심장병으로 갔어. 지금은 한스의 도움이 없으면 장도 못 봐. 나 혼자서 다 알아서 해야 하는데 말이야. 아직도 내가 읍내에 나가면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하지. 맥의 친구들의 아이들만 빼고. 내가 아무리 친절하게 해도 소용없어. 어느 젊은 것은 내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 거야. 백 년을 산들 천 년을 산들 나는 여전히 이방인인 것 같아. 나 죽으면 영혼이라도 고향에 가려나.”

한스는 다과를 준비하는 혜자와 요한을 보더니 말했다.

“오늘 맥을 보러 가면 어때? 요한 자네도 맥의 고향에 가보면 좋아할 거야. 오늘은 즐거운 소풍을 가는 거야.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 어때? 다들 좋지? 자, 그럼 서두르라고.”

한스가 부산을 떨며 재촉하자 각자가 소풍 갈 준비를 했다. 요한이 운전하는 차는 73번 국도를 따라 깊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난 산길을 따라 달렸다. 차는 잿빛 구름 아래로 숲을 만나고 폭포를 지나고 산허리를 돌아 맥의 고향으로 찾아들었다.

맥의 묘비 앞에서 장 할머니는 조각보에 싸 온 음식으로 차례상을 배설했다. 요한과 아내는 맥의 묘비에서 묵념을 드렸다. 장 할머니는 한스의 도움을 받아 묘지를 둘러보았다.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전에서 만난 혜자를 사랑한 맥 도슨 여기에 잠들다>

한스는 요한과 아내에게 묘비에 쓰인 말은 맥이 혜자를 위해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했다. 장 할머니는 맥의 비석을 쓰다듬으며 요한에게 말했다.

“나 죽으면 맥 곁에 묻어줘. 그리고 김 목사님, 멀어도 가끔은 나를 보러 올 거죠?”

한스는 요한을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요한은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장 할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조각보에 싸 온 음식으로 나눈 점심은 푸짐했다.
눈발이 조금씩 날리더니 점점 함박눈이 되어갔다. 요한이 운전하는 차는 73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그만 멈추어야 했다. 스프링 필드로 가는 산길이 눈으로 막혔다.

요한의 아내가 힘들어했다. 장 할머니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더 눈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겠어. 이러다 가는 눈 때문에 길에서 애를 낳아야 할지 몰라. 요한 어서 차를 돌리라고.”

눈길이 미끄러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차가 길 밖으로 밀려갈까 봐 최대한 조금씩 차를 움직였다. 자동차 바퀴에 단 체인도 눈길에서 헛돌았다.

“아무래도 제가 내려서 밀든지 아니면 뒷바퀴가 밀리지 않도록 무엇이든지 받쳐야겠어요. 한스가 운전대를 잡아주면 좋겠네요.”

요한은 기어를 1단에 넣고 핸드 브레이크를 꽉 채웠다. 눈발이 점점 더 굵어지면서 산 계곡에도 옅은 어둠이 따라오고 있었다.

요한의 자동차는 곁길로 밀려 있었다. 요한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눈 덮인 덤불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지 못했다. 눈길에 넘어지면서 요한은 손으로 눈을 치우며 적당한 돌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길에 잡히는 것은 풀뿐이어서 요한은 포기하고 찻길로 나왔다. 한스가 걱정스러운지 갓길에서 요한을 보고 있었다.

“알맞은 받침돌이나 나무가 없나 보네. 저 아래 개울로 가서 찾는 것이 더 낫겠는데. 요한, 한 번 더 수고해 주게. 나는 윤지가 어떤지 보고 오겠네.”

요한은 자동차의 차폭 등 빛을 보고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그때 차 쪽에서 급한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서둘러 길 위로 올라갔다. 장 할머니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서둘러야겠어요. 진통이 주기적으로 오는데요.”

차 쪽으로 가던 요한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통화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한스, 차를 들판이나 핸드폰이 터지는 지역으로 가서 111에 도움을 받으면 어떨까요? 그러면 헬기라도 보내주겠지요.”

“그거 좋은 생각이지만, 이 지역은 대체로 다 핸드폰이 잘 안되는 곳이어서 말이야.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아야지.”

개울에서 가져온 돌을 차 뒷바퀴에 고정하고 요한은 천천히 차를 전진시켰다. 차바퀴가 몇 번을 헛돌더니 앞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요한은 가던 길을 돌아 그레이 마우스 쪽으로 갔다. 거칠어진 눈발이 앞 유리에 급하게 찾아들고 있었다. 차는 낮은 언덕의 곁길로 나란히 달리는 호수를 따라 나갔다. 차바퀴에 감긴 체인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자동차는 아주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요한, 핸드폰의 신호가 가끔 깜박거리네. 저 언덕 위에 가면 터지겠네. 윤지, 조금만 참게. 혜자, 윤지 상태가 어때요”

함박눈은 넓은 호수를 덮고 서던 알프스의 장엄한 산들 위에 내리고 있었다. 차는 산자락을 휘돌아 언덕길로 들어섰다.

“신호가 너무 희미해. 아직 연결이 안 되네.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아.”

한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요한에게 말했다. 요한은 운전하면서 뒤를 보는 거울로 아내의 모습을 살폈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만일을 대비해서 준비해야겠어. 병원까지 가려나 몰라.”

장 할머니는 한스와 요한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좀 더 높은 언덕 위에서도 핸드폰은 연결되지 않았다.

“한스, 아무래도 제가 나가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 일단 차를 세우고 자네가 올라가 보게. 여기는 걱정 말고.”

요한은 눈 덮인 산언덕을 혼자 기어 올라갔다. 신호가 잡혔다가 꺼졌다 가를 반복하더니 한참을 올라가서야 연결 표시가 약하게 들어왔다.

“111이죠. 아내가 곧 출산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아서스 패스에서 그레이 마우스로 가는 73번 국도에 있습니다. 위치요? 아서스 패스 쪽이 더 가까워요. 어두워지고 있으니 자동차 불빛을 보면 저희의 위치가 보일 겁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지금 임산부와 함께 있느냐고요? 아니요, 저는 지금 산 위로 올라와서 전화하는 거예요. 산모 곁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어요. 예. 할아버지에게도 핸드폰이 있어요. 그런데 산 밑이라 통화가 안 되네요. 알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요한은 찻길로 내려왔다. 급하게 차 문을 열고 요한이 말했다.

“연결됐어요. 헬기를 보내준다 해요. 아내는 좀 어때요?”

“요한, 축하하네. 딸이네. 자네가 탯줄 자르게. 혜자에게 받은 가위가 있네. 그렇게 멍하게 서 있지 말고 들어오게. 아기가 춥네.”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가위를 집어 들었다.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윤지는 잘 있지요.”

“네, 잘 있지요. 할머니, 좀 어떠세요.”

장 할머니는 이동 의자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와 줘서 고마워. 저 영감이 같이 가자고 또 졸랐지?”

“아니에요. 제가 가자고 했어요.”

요한은 한스를 보면서 말했다.

“김 목사가 변명해도 소용없어. 내가 다 안다고. 그냥 병원에서 운행하는 미니버스 타고 가면 되는데. 굳이 오겠다는 것은 뭐야. 기다리는 거, 다 불편한 줄도 모르고.”

“하하하, 이럴 때는 한국말로 흉보는 것도 좋네요. 그렇죠, 할머니.”

“그래, 우리 흉볼 때는 한국말로 하자고.”

한스는 혜자와 요한이 나누는 말의 분위기를 보고는 한마디 했다.

“내가 모를 줄 알고. 지금 두 사람 내 흉보고 있지? 나도 다 안다고. 내가 한국에서 지낸 것이 얼만데 내가 모를 줄 알고?”

한스와 장 할머니가 정겹게 마주 보고 웃는 것을 보고 요한은 기분이 좋아졌다. 요한은 장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자동차 뒷자리에 앉혀 드리고 이동 의자를 트렁크에 실었다. 한스도 앞자리로 오지 않고 장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뒷자리에 함께 앉았다.

요한은 차를 목사관으로 몰았다. 당황하는 한스와 장 할머니의 눈치를 의식하면서. 아내는 벌써 이른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 할머니는 한스보다 더 목사관에 오는 것을 미안해했다. 마음은 더 오고 싶었지만, 남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는 마음이 강한 장 할머니는 가능하면 목사관에 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조각보로 밥상을 덮던 아내가 활짝 웃으며 장 할머니의 발그림자를 맞았다. <끝>

7월 27일은 한국전쟁이 정전된 날이다.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2019년 7월 21일(364호)에 실은 단편소설을 한국전쟁 정전(1950.6.25-1953.7.27) 70주년을 맞아 재 수록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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