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He who walks with the wise grows wise, but a companion of fools suffers harm.
마중지봉(麻中之蓬), 이는 구부러진 쑥도 삼밭에 나면 자연히 꼿꼿하게 자란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다. 주변 환경은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잘 알려진 사자성어, 근묵자흑(近墨者黑) 또한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변의 환경과 인물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특히나 자녀를 둔 부모라면 그들이 좋은 친구를 만나고 또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자아가 온전히 형상되지 않고 고착되지 않은 어린아이일수록 주변 사람에게 쉽게 영향을 받고, 바르고 슬기로운 모습보다는 거칠고 무례한 모습에 더 큰 자극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가까운 사람을 닮아가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말씀도 동행하는 사람은 서로 닮게 된다는 원리를 교훈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성경 속의 인물을 예로 들자면 르호보암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 노역의 강도를 줄여 달라는 백성들의 청원을 받는다. 그는 백성들의 요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먼저 지혜와 경륜이 있는 원로들을 불러 의견을 듣는다. 그들은 나라의 평화를 위해 백성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함께 자란 젊은 관원들에게도 조언을 구한다. 혈기와 패기가 넘쳤던 그들은 더 중한 노역으로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며 강하게 나갈 것을 권한다. 결국 그는 젊은 관원들의 말을 들었고, 그로 인해 나라는 두 동강이 나버린다. 물론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지만, 그 과정 중에 르호보암의 미련한 선택이 큰 몫을 했다.
우리는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누구와 동행하고 있는지, 누구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지 말이다. 함께 동행하며 대화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곁에 있다면 참으로 큰 복을 받은 것이다.
혹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며 대화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소원 세 가지를 기록했다.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바람이다.
참고로 이 세 가지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 시작을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데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인자, 곧 자비를 사랑하게 된다. 자비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위는 곧 공의가 된다.
스스로 질문해 보자.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하는가? 주께 묻고 듣고 말하며 답하기를 원하는가?
호기롭게 주님보다 앞서지 않고 우울하게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옆에서 발맞춰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겸손한 백성으로 살길 축원한다. 선하신 주께서 주와 동행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의를 이루시며 해를 면하게 하실 줄 믿는다.
기쁨에 찬 기다림
시편 13: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How long, O LORD ? Will you forget me forever? How long will you hide your face from me?
How long must I wrestle with my thoughts and every day have sorrow in my heart? How long will my enemy triumph over me?
아이나 어른이나 기다림은 지겹고 불편한 것이다. 모든 것을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현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택배가 늦게 온다거나, 인터넷이 느리거나, 공공기관의 행정 처리 속도가 느릴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며 불평한다.
마찬가지로 삶에 찾아온 다양한 문제들이 내 뜻대로 신속하게 해결되지 않고 지속될 때 우리는 답답함을 호소한다. 오늘 묵상할 말씀을 기록한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기자의 처지는 참으로 안타깝다. 원수의 공격과 비방으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다. 한동안 믿음으로 잘 버텼지만 이제 견디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이에 기자는 하나님께 따지듯 질문한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누구나 이 질문을 해봤을 것이다. 팬데믹과 전쟁의 여파, 천재지변으로 인해 입은 피해 속에서 언제 회복되고 정상화될지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믿음의 유무여부를 떠나서 모두가 회복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다림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다. 그것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는 차이점이다.
시편 기자는 끝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기쁨을 채우는 법을 교훈한다. 그는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기다림 속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주의 사랑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이란 단어가 중요하다. 그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통상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위로해 줄 사람을 찾거나 실제적인 도움을 구하기 위해 유력한 자를 찾지 않았다.
그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에게 구원을 소망하게 했다. 그 구원으로 말미암아 그의 기다림에 영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그의 기다림은 기쁨으로 변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간절함이 감소하곤 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의 시간을 기쁨으로 채우면 주를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커질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면, 상대를 향한 기다림은 고욕이 되기보다 기쁨이 된다.
그 사랑에서 샘솟는 기쁨으로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를 기다리길 바란다. 순결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주를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