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왜 기도하는가?

코로나 이후(Post COVID-19) 시대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획일화된 공적 예배보다는 자기 자신의 정신을 직접 관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언적 계시와 같은 개인적 경건에 기초한 행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현재와 같이 교회는 기술적인 영역에서 갈수록 권위를 잃어가고, 무엇이든 실제로 효과가 있으면 누구나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시대에 기도는 계시 수용의 가능성으로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항상 우리 삶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의 섭리대로만 이끌어 갈 것 같으면 기도는 왜 하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신학의 답은 하나님의 강제적 섭리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 원하던 응답을 받으면 받은 대로, 또 받지 못하면 받지 못한 대로 그 결과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기도가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확인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기도로 하나님의 뜻은 바꿀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란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도록 하며 자족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이건 분명 체념입니다. 그것도 무한한 자기 체념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을 믿고 그의 섭리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래 극단적인 자기 체념을 전제합니다. 이는 부단한 자기 체념과 자기 부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절망의 상황
사무엘상 1장에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서원 기도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장의 이야기는 사사기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사기에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 6; 21:25)는 문맥에 의하면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 한 세대, 즉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야훼를 알지 못하며”(삿 2:10b, 11)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무엘 출생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불임의 고통과 이로 인한 희망 부재의 절망적인 상황은 사사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연결될 수 있으며, 또 이후의 초대 사울 왕권의 혼란과 연결될 때 이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에브라임 산지의 출신 엘가나입니다. 그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고 브닌나에게는 열(혹은 많은)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관계를 보게 됩니다. 문맥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브닌나는 많은 자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스스로 열매가 있는 여인으로, 그래서 한나보다 당당한 여인으로 스스로 여깁니다. 그녀는 많은 자녀의 어머니로 가문을 번성하게 한 위대하고 장한 어머니라 생각하고, 스스로 힘 있는 여인으로 자처합니다.

이 점을 전면에 내세우며 매년 성전으로 올라갈 때마다,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기도 하며, 또 괴로워하는 한나를 바라보며 즐기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한나에게 불임은 세대의 단절을 의미하며, 더 이상의 미래의 희망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남편 엘가나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한나를 위로하였으나, 그녀에게는 전혀 위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임의 문제는 두 번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삼상1:5, 6) 말씀처럼 하나님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한나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할 수 없고, 어느 누구의 위로가 한나의 상황을 바꾸는 데 도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극적 선언은 한나의 불임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자기 비움의 기도
기도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 속에서 기도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새로이 발견하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도 발견합니다. 그러하기에 때로는 기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다른 사람과 떨어져 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성전으로 나아갑니다(삼상1:10-11).

한나는 자기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은 이 문제에 아무런 해답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브닌나가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억눌렀듯이, 이제 스스로 하나님께 앞에서 “마음이 슬픈 여자”로 한없이 낮아짐으로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삼상1:10) 합니다.

참 기도란 자기 비움의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나에게 전부이며, 나는 당신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자기 비움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청원합니다.

한나는 세상의 권위로 힘을 과시하는 브닌나 앞에 자기 의(義)를 비워내는 인간의 전형을 나타냅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아들을 허락하면, 이 아들을 다시금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삼상1:11). 이 서원은 사무엘을 그녀 곁이 아닌 실로에 ‘영원히’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선물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려 한다면, 이는 자기애(愛)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나는 선물로 받을 아들을 다시금 하나님에게로 돌려주겠다고 서원하면서, 자기애를 내려놓습니다.

온전한 기도란 자기 비움으로, 자기 의와 자기 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떼쓰는 인간의 불평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완전한 자기 비움’의 고백입니다.

여호와께서 한나에게 태의 문을 여심으로, 한나는 사무엘을 얻게 되었고, 그녀는 선물로 받은 아들을 다시 영원히 돌려 드리기를 원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실로 성전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엘리 제사장에게 기도의 진정한 목적을 말합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뒤이어 그녀는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1:28).

한나는 서원하여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다시 드림으로 그녀의 서원은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이는 그녀가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선물로 받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한 것같이, 그녀의 서원은 가시적 소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도에만 의지하여 살아가며 또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살겠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가시적인 안전보장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인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기 비움의 완전한 형태이며 경건한 삶의 한 형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기꺼이 살고자 한나는 기도합니다. 한나는 눈에 보이는 사무엘을 그녀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안전장치로 삼지 않고, 오히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을 완전히 비워냅니다. 그리고 그녀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완전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인간이 자기의와 자기애에 사로잡힐 때, 이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길에 장애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비움을 통하여 그 장애가 극복될 때 그는 하나님 계시에 도달하는 길을 열게 합니다. 물론 인간의 비움이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자비의 영역이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요청할 뿐입니다.

자기 과시의 인간은 신의 부재를 초래하게 되지만, 기도에서 보여준 자기 비움은 신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나아가 한나의 서원 기도에서 보여주는 가시적 자기 보장의 수단인 아들을 포기함으로써 실천하는 완전한 ‘자기 비움’의 경건은 하나님의 통치를 자기 삶으로 가져오게 합니다.

만약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얻은 아들일지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적 경건은 예언적 계시에서 신적 기원의 모호성을 극복하게 하며, 하나님 계시에 도달하는 길을 열게 합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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