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태복음 23:1-7)

오래전에 한 학생의 집에 심방을 가게 되었는데 집에 들어가니 성경 말씀을 컬러로 프린트해서 거실과 방과 화장실에 이쁘게 꾸며서 걸어도 놓고 붙여도 놓고 액자에도 넣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보기에도 은혜가 되어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보니 학생 어머님이 웃으시며 “심방을 온다고 해서 우리 애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았는데 실천하는 말씀은 하나도 없네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모습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사실 마태복음 23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이러한 모습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책망이 얼마나 엄한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그들에게 직접 책망하십니다.

3절에 이 책망의 핵심이 있는데 바로 “저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저들이 하는 말의 내용은 좋은데 말만 하지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들이여”라는 말씀은 그러한 저들의 삶은 저주받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엄히 꾸짖으시며 그들의 행동을 화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점검할 때에 잘못된 신앙생활을 구별하고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과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삶은 실제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신앙인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말만 했다는 것이 그들이 화려하게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 당시 바리새인들보다 율법과 계명을 잘 실천했던 사람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신 본질적인 이유는 그들이 말만 하고, 말의 내용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분명히 율법에 기록한 대로 실천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모든 행동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실천하려고 할 때에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 19-20절에서 율법의 가치와 기능을 설명하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율법이 지시하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 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제시되자 인간은 선하지 않기에 인간의 소원은 의롭거나 선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였고 율법을 지키고자 해도 지켜낼 의로운 능력이 없는 우리의 무능력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우리에게 한 일은 우리는 죄로 인해서 심판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과 증명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저희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그 경문 띠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의 모습입니다.

“경문 띠와 옷술”은 구약에서 요구하는 율법들로 대표적인 예로 신명기 6장 4-9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가르치며 또 그것을 네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말씀을 양피지에 써서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팔뚝에 매고 집 기둥에 새기고 문에도 기록해 놓았습니다. 옷술은 옷의 끝에다가 말씀이나 신앙 및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을 새겨 넣은 긴 옷 단이나 장식으로 더 많은 말씀을 새겨 넣기 위해 옷술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의미가 단순히 그런 것을 만들어서 몸에 가지고 다니면 된다는 의미일까요?

말씀을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형태를 말씀에 맞게 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아야만 된다는 뜻으로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지 단순히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는 소위 기독교 문화와 기독교 장식용품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경문 띠를 넓히고 옷술을 크게 한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다 순종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그들의 생각이 여기에 멈춰 있고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어떤 책의 제목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반대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신앙은 매우 위험합니다.

로마서 7장 15-24절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또 다른 마음인 죄성을 발견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죄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거룩과 의와 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실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실천하고 싶은 마음만 갖고 있지 참다운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확인하고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바울과 같이 신앙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는데 그 고민이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비참한 사람)이로다”라는 절망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곤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큰 절망이고 비참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싶고 선과 의와 거룩과 신령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도 있고 마음도 있고 소원이 있음에도 다시 죄를 짓는 우리 신앙의 현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고민을 해결하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어야만 하는데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18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은 바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님을 요청해서 성령님이 우리 자신을 대신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라는 책임을 떠넘기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능력은 우리에게 아직 없고 오직 성령 하나님께만 있기에 이 거룩한 싸움을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만 싸우려고 하지 말고 성령님께 요청하고 의지하여 실천하라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책임감을 느끼고 우리의 삶에서 순간순간 맞이하는 선택과 결정에 하나님의 뜻을 돌아보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때로는 인내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초청한 것은 믿음의 행위이고 주님의 은혜를 구한 것이기에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기에 신앙생활은 우리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도 아니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율법은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라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율법으로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의로 삼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고민이 깊어지면서 해답을 발견했는데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고백입니다. 즉 곤고한 사람이라는 고백과 자랑할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은혜임을 깨달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힘주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고 성령을 좇아 행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듯이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육신을 따라 행하면 육신의 따라간 것에 대한 증상들이 나타나고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은 단순히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가 나타나고 있느냐?”라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앙적인 명분과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는데 거기에 음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당 짓는 것, 이단, 술 취함 등이 나타나면 겉으로는 신앙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육체를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등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좇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증명하기에 바쁜 바리새인들과 같은 삶은 열심히 사는 것 같아도 십자가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마저도 자기를 자랑하는 것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성령을 좇는 것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깊이 아는 믿음이고 그 믿음은 우리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처럼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렇기에 성령을 좇아 행하며 감사가 가득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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