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에 분량으로 본다면 이삭이 가장 적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삭도 양식이 풍부한 애굽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이 이삭에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은 양식이 풍부한 곳도 아니었고 이삭에게 안전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내 리브가로 인해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염려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할 정도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삭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랄에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는 이삭
성경은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농사라는 것은 한자리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는 일입니다. 이삭이 장소를 옮기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그가 그 땅에서 농사하였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삭이 그해에 백 배나 얻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삭이 얻은 결과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그 근원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였는데, 이삭은 흉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100배의 수확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그 해 100배의 수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복 주심의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성경 말씀에는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아지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위기에 처한 이삭
이삭이 누리게 된 부는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불러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면서도 이삭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할 수 없었던 것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를 보호하도록 한 조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는 쉬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습니다. 우물은 많은 양과 소가 있는 이삭에게는 짐승에게 마실 물을 공급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우물들을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는 이삭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물의 근원을 찾기도 힘들 뿐 아니라 그곳을 찾아 흙을 파내는 힘든 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우물인데 시기심은 그렇게 수고하여 얻는 소중한 우물을 메우는 것에 거침이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시기심으로 시작하여 이삭을 골탕먹이는 정도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과 소가 떼를 이루는 짐승들을 가지고 있는 이삭에게는 이렇게 우물을 막고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에게 만행을 저질렀지만, 이삭이 그들의 악행을 신고하고 그들을 처벌하도록 요청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그 일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우리를 떠나라’라고 말하였습니다. 블레셋 왕은 이삭을 그 땅에서 추방을 한 것입니다. 분명 이삭은 그때까지는 안전하다고 생각되고 그와 그의 아내가 나름대로 살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서 거주하였겠지만, 이제는 블레셋 왕의 명령으로 인해 그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난 이삭을 블레셋 사람들은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이삭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삭의 종들이 판 우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우물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을 때, 그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삭에게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삭이 계속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으면서 브엘세바까지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이삭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에 장막을 쳤습니다. 이삭은 자신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곳에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이 그곳에서 우물을 판 것은 그와 그의 식구들이 그곳에서 오래 머물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강조하는 이삭
이 일련의 사건 속에서 성경은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이 모든 여정을 홀로 한 것이 아니라 이삭은 ‘우리’라는 사람들과 함께 이 모든 것을 겪었습니다. 흉년에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안전하지도 않은 가나안 땅에 계속해서 머물렀던 이삭과 함께 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농사하여 그해 100배의 수확을 거두는 때에도 함께 그 수확을 거두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삭이 마침내 거부가 되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로 인해서 고초를 겪고 블레셋 왕이 이삭에게 ‘우리를 떠나라’고 할 때에도 이삭과 함께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의 다툼을 피해 세 번째로 우물을 팠을 때 더 이상 그랄의 목자들이 다투지 않자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할지로다’라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 즉, 이삭의 종들과 이삭의 목자들이라고 하는 사람을 포함한 이삭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이삭은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라고 하는 이삭의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오래 있다 보면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합니다. 이삭이 이런저런 일을 만나면서도 자신이 혼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공동체를 챙기고 있고,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도는 ‘마지막 때에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라고 하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늘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로 하나님이 부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뉴질랜드 교민 사회가 여러모로 녹록하지 못합니다. 너무 빨리 변화하는 사회를 따라가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각자 도생의 길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 가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중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심을 믿고 나아가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함께 그 은혜의 식탁을 주님 안에서 나누는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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