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주를 사모하는 일에는 은퇴가 없다

Culture Shock가 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교회를 만났다고 생각했고, 예배마다 은혜를 받았고, 교우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서 언어와 문화적인 갈증이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정점이 되니 영어예배 속에 앉아 있는 자체에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갑자기 길을 잃었다. 계산에 없는 일이었다. 크게 당황했다.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우울감이 급습했다.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다.

본질을 놓치니 방향을 잃어버렸다
시니어 전략 333을 세웠다. 1/3 잘 놀고, 1/3 잘 일하고, 1/3 잘 섬긴다는 333 잘잘잘 전략이다. 그런데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노는 일에 치중했다. 그런데 돈 떨어지니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데 힘을 쏟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의 일을 적당히 키위 교회에서 한인담당 목사로 일하려고 하던 얄팍한 계산이 바닥을 드러냈다. 영적 기근이 시작된 것이다.

컬쳐 쇼크는 언어 문화적인 갈증에서 빚어진 일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영적인 고갈에서 오는 결과물이다. 은퇴하고 2년 동안은 매일 성경을 통독했는데 3년 차부터는 말씀 통독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 생계에 치중하느라 시간도 부족했지만 ‘이제는 말씀 먹는 일 안 해도 문제없다’는 착각이 빚어낸 불상사다. 말씀 먹는 일을 3개월쯤 중단하니 이상 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컬쳐 쇼크가 왔고, 길을 잃고 엄청 방황했고, 분노가 일어나고 미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답이 없었다. 대혼란 속에 빠져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이러다간 죽겠구나’라는 두려운 속에서 ‘주여,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한 기도를 하다가 깨어났다.

고난을 주신 이유를 깨닫다
성경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빨간 글씨만을 추적하며 되새김질하는 말씀 묵상을 시작했다. 신약성경에서 기록된 두 번째 빨간 글씨는 신명기 8:3을 인용하신 마태복음 4:4절이다.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며 만나를 통해서 겨우 연명하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나에게 그렇게 하셨다. 삶의 군더더기와 거품이 완전히 빠져 버린 절망 속에서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말씀 없이 살 수 없습니다.’라는 뼈에 새기는 진실을 알게 해 주셨다. 말씀이 다시 공급되기 시작하니 내 영혼이 힘을 얻는다. 절망과 두려움과 앞날에 대한 근심 염려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희한한 은혜이다.

본질을 회복하니 길이 보인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 인생 방향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믿되 말씀 공급 없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시는 그런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빠지고 싶지 않다. 말씀이 없으면 지독한 어둠이 엄습한다.

주의 멍에를 다시 매다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Matt 11:29 All of you, take up My yoke and learn from Me, because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30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가 어떻게 쉽고 가볍단 말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 원수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목숨과 삶 전부를 바쳐야 가능한 일이다. 이게 어찌 쉽고 가벼운 일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를 내려놓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인생 말년에 다시 시작된 광야 생활을 통해서 깨지고 부서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내려앉아 보니 내려놓는 것이 쉬워졌다. 왜냐하면 내려놓아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을 때는 나를 내려놓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내려놓는다고 항상 외쳤지만 가진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놓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내려오고 잊혀 진 인물이 되어 가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뒷방 늙은이가 되어 보니 내려놓는 일이 쉬워졌다. 뒷방 늙은이의 삶을 거부하고 발버둥 칠수록 추하게 된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너무나도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반복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생 재정비가 가능해진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Matt 12:6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7…I desire mercy and not sacrifice…”

35년 동안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일하는 일은 내가 책임 맡은 성도를 돌보고 교회를 키우는 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 재산을 바치고, 죽을 힘을 다해서 교회를 돌보고 키우는 일에 전심을 다했다.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고 목회자로서 후회 없는 목회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성도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소중히 여긴 나머지 예수님과 교제할 시간이 부족했다. 너무 지나치게 교회와 주일성수를 생명처럼 여겼더니, 교회나 주일성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놓쳐 버린 순간들이 많았다. 이제서야 교회보다 예수님이 크게 보인다. 너무나 죄송하다.

직분 주시고 능력 주시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주셨을 때는 주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크게 보더니 이제 다 사라져 버리니까 이제서야 주님 붙잡는다. 한심하다. 바보 같다. 하지만 자리에 내려와 보니 이제서야 주님이 보인다. 주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크신 분이신지 보인다.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그 분을 따라가야 할지도 조금씩 새로운 각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큰 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작은 이들, 작은 것들의 소중함이 보인다. 그래서 다행이다. 감사하다. 더디 가더라도 주님 마음 놓치지 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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