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담론에서 시작하는 학문이지만 대재앙과 같은 전쟁과 전염병, 지진과 기근 등 만인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받는 현실 앞에 때로는 언어의 무용성을 경험하곤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으로 슬픔과 상실에 빠진 이에게 모든 고난에는 이유가 있으며, 이는 더 큰 선을 향한 수단이 된다는 해석은 어떠한 정당한 이유를 찾는다고 해도 정당화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글은 고난에 대해 신학적인 설명을 보태기 위함이 아닙니다. 단지 생생한 고난의 문제로 지극히 인간적인 슬픔, 우울, 무력감, 자기 상실에 빠진 이들을 인간 실존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늘 긍정적인 태도를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커다란 슬픔과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멜랑콜리의 관점으로 이해해 바라보려 합니다.
‘멜랑콜리’(melancholy)는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용어로 알 수 없는 우울함이나 슬픔, 애수, 침울함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검은색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멜랑(melan)과 담즙을 의미하는 콜레(chole)의 합성어로 직설적인 의미는 ‘흑담즙 병’ 입니다.
고대 그리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인체가 혈액, 담즙, 점액, 흑담즙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흑담즙은 조울증 등 기분에 영향을 끼치는 일종의 호르몬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겼고, 이것이 과도하게 나오면 불명확한 이유로 슬프고 불행한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면서 우울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멜랑콜리는 우울증과 간질병뿐 아니라, 우수와 애수, 사랑과 죽음이 관련되어 긍정과 부정의 상실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멜랑콜리의 기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멜랑콜리커(Melancholiker)’라고 합니다.
시대에 따라 멜랑콜리커는 다르게 이해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멜랑콜리커는 신에게 미움과 벌을 받아 미치고, 사람에게 버림받아 방황하며, 자기를 학대하는 경향을 보이는 인물로 설명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지프의 신화에서와 같이 정해진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는 비극적 영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이래로 기독교 정신이 만연한 중세에는 멜랑콜리를 원죄와 관련지어, 우울한 감정을 신의 사랑과 은총에 대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로 죄악시하였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멜랑콜리가 의미하는 게으름, 무관심, 무의미, 권태, 무감각, 나태의 측면을 ‘아케디아’(acedia, 영적 태만, 영적 무기력, 영적 나태로 번역)라는 이름으로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승이 빠질 수 있는 전형적인 위험한 상태로 여겨 노동을 강조합니다.
이성이 지배했던 근대에는 멜랑콜리아를 강박증세로 이해했고, 현대에 접어들면서 여러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멜랑콜리를 현대의 고독한 사람들이 겪는 것으로 파악하는 동시에, 어떤 종류의 멜랑콜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진리를 파악하고 아름다움을 창작하는 근원이 되는 정신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멜랑콜리커, 욥
성서에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 중 예루살렘 중심부에서 벗어나 성전 설교를 탄식과 눈물로 외친 예레미야와 더불어 욥만큼 회자되고 해석되는 인물은 없을 듯합니다.
욥은 멜랑콜리커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인물인 욥을 오늘날 심리학이 정의하는 멜랑콜리커인지 아닌지를 입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멜랑콜리커로서 욥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여 무한한 자기 체념의 멜랑콜리를 느끼지만, 세 친구들이 요구하는 세상의 질서에 편입하지 아니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제3의 길을 추구합니다.
욥이 고난과 처참한 비극을 딛고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희망도 주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하나님의 힘에 대한 무한한 자기 체념과 이에 대한 인간의 자기 상실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욥의 고난에 대한 어떤 신정론적 답변도 이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욥기의 저자는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고 시작하고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2:3)라는 평가를 거듭 하나님으로부터 받음으로, 행복의 절정에서 시작된 비극은 욥의 잘못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욥 3:1-3).
욥은 인과율의 원리에 따라 자신을 비난하는 세 친구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인과응보의 지혜를 과신한 그들을 향해 비탄을 터뜨리면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부르짖습니다. 그는 모순 속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의 운명을 저주합니다.
이러한 욥의 언어에는 외로움의 비극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이면에는 죽음을 넘어 어떠한 수단으로든 삶을 살아내려는 처절한 인간적인 실천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인 운명을 거부한 채, 궁극적 존재인 하나님과 접촉하고자 하는 간절한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에서 말하는 욥의 회복은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 다시 다른 자식을 얻고 재산을 두 배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잃은 욥이 다시 또 다른 자녀를 얻은 것을 가지고, 자식에 대한 상처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자기 체념의 ‘누미노제’(Numinose)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1-4).
하나님은 욥기 전체 42장에서 38장 전까지 욥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욥과 하나님이 만나는 클라이맥스까지, 하나님은 마치 숨어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고난에 무관한 분이 아니라 욥의 항의를 듣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욥은 질문했고 하나님은 반문하셨습니다. 비록 항의했던 내용에 대한 응답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질문에 반문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해를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인간이 운명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촉구입니다.
하나님의 폭풍 같은 다그침에 욥은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지만, 전지전능한 하나님 앞에서의 굴복이라기보다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뜬 순간이며,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이를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말을 빌리면 “누미노제”(Numinose)로, 욥과 하나님의 만남을 존재와 비존재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누미노제’란 인간이 거룩한 존재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진실로 피조물임을 존재론적으로 통감하는 감정적, 미학적, 직관적 체험”입니다. 한 마디로 ‘거룩의 체험’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오토는 모든 종교의 시작에는 이런 누미노스적 차원의 신비하고 매혹적이며 두렵고 떨려오는 요소가 실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욥은 압도당할 만큼의 신(神) 체험을 통해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접촉’은 욥 인식의 경계를 넘어 무한의 차원으로 인도했고, 무한성 속에서 끝없이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철저한 자아 체념의 ‘질문’이 끌어낸 새로운 차원이며, 이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과 상실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입니다.
욥과 하나님의 만남은 욥이 상실로 인해 자기중심으로 매몰되었던 자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 시각이 확장된 사건으로 욥이 고난 속에서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님을 확인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신비를 통한 영성적 능력의 확장으로 욥이 겪는 상실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한 자기 인식의 확장과 통찰이었습니다.
까뮈의 시지프가 운명을 조소하며 바위의 무게를 짊어졌다면 욥은 고난 뒤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삶의 실존적 경험 속에서 스스로 ‘나’의 이야기, 즉 자기 체념의 상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의 비난 속에서 존재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외롭고 고독한 종교적 멜랑콜리커로서의 욥은 전통 신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벌이는 고독한 신앙의 투쟁입니다. 이 또한, 지극히 세상적 현실이나 초월적 이상으로 도피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신앙을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경건한 신앙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자기 체념도 믿음입니다.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말을 잃어버린 욥은 한편으로는 체념의 무한운동을 하면서 신앙의 믿음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며,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자기 체념의 신앙은 신성불가침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런 확인은 미래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연결됩니다.
결국 욥의 종교적 멜랑콜리는 욥을 파멸시키지 않는 움직임으로 작동했으며, 하나님을 파괴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이 고난을 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과정은 주어진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종교적 멜랑콜리커로서 자신의 믿음을 지킨 과정이었습니다.
이 시대, 세상 앞에선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이 세상의 질서에 충돌할 때, 자신이 겪는 슬픔과 총체적인 무력감, 자기 체념의 종교적 멜랑콜리 역시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고난은 회피하여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어내고 의미와 무의미, 삶과 죽음 사이의 긴장을 무한한 자기 체념의 과정으로 버텨냄으로 이겨 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