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간의 루틴을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회오리바람처럼 수많은 것들이 쓸려 지나갔다. 리더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결정하고 주목받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 서서히 잊혀 가는 인물이 되는 것 등등을 받아들이는 일은 힘겨웠지만 현재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나니 할 수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멈추어 서 보니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현역에 있을 때는 오직 교회 일에만 집중했다. 삶이 보이지 않았고 교회만 보였다. 그런데 현역에서 물러나 보니 세상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내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객관자의 눈으로 보니 허와 실이 보인다. 섬긴다고 했지만 섬김을 받았고, 낮은 자로 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나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희로애락의 모든 일들이 나의 내면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찾아내고 견고한 내면을 기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은퇴는 공공의 나를 버리고 오롯이 나를 대면하고 나를 완성해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채워 나갈 때 비로소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고 실험해 보고 도전해 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사람을 돌보는 일은 고통이면서 기쁨이다
전도 보다는 양육이 내 사역이었다. 특히 다음세대 지도자를 양육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사람들이 곁길로 나가고, 등을 돌리고, 비난을 쏟아내는 일들을 겪으면서 길을 잃었다. 사람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이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휴직기를 가지면서 나를 대면해 보니 나의 기쁨은 사람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영혼을 사랑하고 돌보는 열정이 왜 식어 버렸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다. 어머니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민 24년 차이다. 그동안 아버님, 장인, 장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남았다. 24년째 한국에 있는 누이들이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어머님은 두 번 뇌경색을 앓으셨지만 정신력으로 이겨 내셨다지만 세월에 장사 없다고 누워 있는 시간이 많으시다.
6월에 방문해서 5주간은 오롯이 어머니만을 위한 아들로 살 생각이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주님을 섬기듯이, 교회를 섬겼듯이, 어머님을 섬길 예정이다. 공공의 삶을 내려놓고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고 가족을 돌볼 기회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같은 시간이다. 어머님을 섬기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을 다시 회복하고 싶다.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추진할 때 생기가 난다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장수촌 대학, 문화 센터, 청소년 연합 집회, 청소년 농구 대회, 세계선교센터,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지에 방문하는 일들을 추진할 때 없던 힘들까지 솟아났다.
하지만 지진 발생 후 십여 년 구조조정을 하며 생존을 위해 견뎌내야 했던 시간은 죽을 만큼 힘들었다. 모든 기력을 소진했고 공황장애까지 경험했다.
지금 2년간의 휴직기가 지나고 나니 다시 내 안에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 생긴다. 아직 10년 이상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다. 다음 세대 지도자 양육에 대한 미련, 노년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일에 대한 숙제가 내내 마음의 부담감으로 남아 있다. 수 차례 도전해 보았지만 번번이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세대 지도자를 양육하는 일과 노년들의 영적 생활을 돕는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계속 기도하며 그 해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이민자와 현지인들의 bridge가 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우리는 1.5세대를 잘 양육하면 이민자들과 현지인들을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해 줄줄 알았다. 하지만 1.5세대들이나 2세들은 그들만의 고충이 따로 있다. 그들도 생존하기에 바쁘다. 누구를 돌보고 누구를 연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이들이 생각보다는 드물다.
양쪽 문화를 다 이해할 수 있는 세대라고 기대했는데 그들도 반반이다. 이민자도 아니고 키위도 아니다. 그들 또한 그들의 정체성을 찾는 일도 힘겹다. 할 수 없이 언어와 문화적인 이해가 부족하지만 1세들이 작은 통로라도 뚫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은퇴 후 키위교회와 한국교회를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하고 싶었다. 수많은 교회를 섭렵한 후에 나와 맞는 교회를 찾아냈다. 탄탄한 신학적인 기반 위에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는 교회이다. 그 교회에서 매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이 교회라면 나의 영혼을 맡기고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신학자들이 코비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부흥하는 메가 처치들을 연구했는데, 부흥의 원인은 두 가지로 함축할 수 있었다. 첫째는 작은 교회들의 연합이고, 두 번째는 Multi-ethnic group을 추구하는 교회들이었다. Hope Church는 이 두가지를 모두 추구하는 교회이다.
내가 출석하는 Hope 교회는 1,200여 명 정도 된다. Hornby에 모 교회를 가지고 있으면서 Rolleston과 West Melton/HalKett 지역에 지교회를 개척했다. 그 지역 중에 롤레스톤은 전략적으로 부흥하는 도시이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2017년부터 롤레스톤에 상주하며 4개 교회를 리더 하는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롤레스톤은 현재 인구 27,000여 명인데 앞으로 5-7만으로 늘어날 계획을 세운 크라이스트처치의 전략적인 위성도시이다.
올해부터 나는 이곳에서 Korean Pastoral Leader, 한국인 담당 목사로 영어예배를 함께 드리면서 한국인들을 돌보는 목회를 감당하게 되었다.
Culture Shock가 왔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영어 예배도 만족했고, 백인 중심의 교회였지만 인간관계에서도 문제가 없었다. 지난 2년간 매주 은혜를 받았고 그들 속에서 인정받았다. 그들도 내가 이민자들과 키위들을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해 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예배를 드리는 중에 조금씩 거부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찬양도 은혜롭고, 설교도 깊고, 세례식도 의미가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컬쳐 쇼크가 온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문화적인 충격과 정서적인 갈증이 내면에 쌓이다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 한인들이 키위교회를 가면 1.5년 한계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서적인 양식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장벽을 어떻게 넘어야 할지 또다른 숙제가 시작되었다. 일단은 적극적인 사역에 앞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기로 했다.
이 시간을 통과하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심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