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하나님의 이름.2

대부분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여호와’라고 답변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출애굽기 3:13-15를 근거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변합니다.

성경의 본문만 보면 “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 스스로 있는 자”라는 도식으로 이해하게끔 되어 있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자존하신 분으로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라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장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3:6)며 자신의 정체성을 ‘조상의 하나님’으로 정의하며 이집트에서 노예로 학대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것이라며 계획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에 모세를 부르시지만, 모세의 거부로 인하여 하나님과 긴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 라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3:14a)…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3:14b).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3:15)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전할 말을 일러줍니다.

이를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조상의 하나님 = 나는 스스로 있는 자 = 스스로 있는 자 = 여호와”로, 그리고 여호와란 이름이 영원한 이름, 대대로 기억할 칭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볼 수 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로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는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הֶיְהֶא רֶׁשֲא הֶיְהֶא)와 “에흐예”(הֶיְהֶא )그리고 “아도나이”(הָהוְי)입니다.

이에 대한 최초의 번역으로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 역은 “에고 에이미 호 온”(εγω ειμι ο ων), “호 온”(o ων) 그리고 “퀴리오스”(κuριος)로 번역하였고, 영어 번역은 보통 “I AM THAT I AM”(“I AM WHO I AM”), “I AM” 그리고 “the LORD”로 번역합니다.

참고로 번역에는 의역(意譯)과 직역(直譯), 그리고 음역(音譯)이 있는데, 문장의 흐름이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역도 괜찮지만, 의미의 변화 때문에 도저히 의역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는 그것이 바로 “아멘”, “메시아”, “여호와” 등과 같은 특수한 고유명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경에는 종종 ‘아멘’을 “진실로”(요 3:5 등)로, ‘메시아’를 “기름 부음 받은 자”(단 9:25 등)로 의역한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여호와를 “LORD=나의 주”로 의역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가능한 한 철저히 음역해야 본래의 의미가 살아나는데 의역을 통해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출애굽기 3:13-15는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은 아직 학자들 간의 견해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는 표현은 ‘아세르’라는 관계대명사를 가운데 두고 바로 전후에 동일한 어원과 형태의 동사를 갖는 매우 특이한 구문으로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며, 구약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최초로 번역된 70인 역은 “에고 에이미 호 온”(나는 있는 자다)라고 탁월한 번역을 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때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될 수 있는, 즉 존재가 실체라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본의 아니게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인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있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에흐예’가 ‘있는 자’라고 번역됨으로써, 하나님이 마치 하나의 존재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70인 역에 대한 평가로 번역되던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그리스어의 관점에서 볼 때 비언어적 표현이 많이 포함되어 어색한 표현들이 많아 어떤 학자는 한마디로 “70인 역의 방법은 그리스어가 아니다”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영어 “I AM WHO I AM”이란 표현도 영어의 통사론에서 매우 어색한 표현이기에 이를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도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한글 번역이 ‘스스로’라는 부사를 추가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 번역은 물론 고대의 어떤 번역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데, 히브리어 ‘에흐예’에 포함되어 있는 1인칭의 의미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70인 역의 영향으로 ‘있음’ 혹은 ‘존재’라는 동사와 연결되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인 듯합니다.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하나인 랍비이자 중세 유대인 주석가 람밤은 하나님의 이름을 ‘에흐예’ 로 보며 그 뜻은 ‘영원히 존재할 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체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할 만한 적절한 이름이 없다고 보았고 ‘에흐예’란 하나님의 이름은 본래적인 이름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참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적절치 않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보여주는 암호 문자와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이해합니다.

또 다른 해석인 유대인 주석인 ‘하함’(Chacham)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전체를 하나님에 대한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달라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존재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70인 역’에서 “에고 에이미 호 온”(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한 것과 같이,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사과’나 ‘책상’과 같은 존재물들에 사용하는 ‘…로 존재한다’라는 술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이름이 있는 존재물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현대 신학자 파울 틸리히는 “하나님의 실존 문제는 물어질 수도, 대답 될 수도 없다. 만일 물어진다면, 그 성질상 실존을 초월한 것에 대한 물음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 대답은-부정이건 긍정이건-하나님의 성질을 몰래 부정한다.”라고 단언했습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전능하고 영원하지만 어떤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 ‘가장 능력이 있는 자’ 등 곧 ‘최고의 존재물’은 결코 아닙니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무규정 자이자 무한정 자이며, 원칙적으로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대상인 하나님은 그가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대로 단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여호와”(아도나이)로 계시합니다. 바로 다음 절인 출애굽기 3:15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에흐예’가 아닌 ‘아도나이’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도나이’라는 이름이 바로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와 문맥적으로나 어원적으로 관련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에흐에 아세르 에흐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이름이 아니라 ‘아도나이’에 대한 본질을 규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그의 ‘이름’을 계시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현존’을 계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하르트무트 게제(Hartmut Gese)는 “하나님은 그 자신을 어떤 본질로 나타내지 않고 자신을 직접 보이신” 것이라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을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알려주시고, “~함으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여호와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는 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호와’는 단순한 이름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중요한 속성이 함유된 칭호(稱號)가 됩니다.

출애굽기 3:13-15의 말씀은 이집트인들의 신적 개념에 영향을 받은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여호와”(הָהוְי, 아도나이)로 밝히시며 자신의 본질을 당당히 밝히심으로 당시 이집트 신화의 신인식을 거부하며 그 존재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은 이름의 술어적 기술로 열거하는 제한된 능력을 갖춘 신이나 그 능력이 서술적 제한 속에 한정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있다’라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데 우리는 ‘스스로 계신 분’이라 의인화하여 부릅니다. 곧 하나님은 자신을 존재로서 계시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를 존재물로 이해하는 일이 성경과 신학 사이에 일어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 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말처럼 보이지도 않고 인식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가 부단히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며,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세상’으로 향하게 되는 원초적인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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