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언 6:6-8)
“Go to the ant, you sluggard; consider its ways and be wise! It has no commander, no overseer or ruler, yet it stores its provisions in summer and gathers its food at harvest.”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피조세계를 가꾸고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셨다.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지혜 또한 허락하셨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사람이 동물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것은 아니다. 사람도 동물에게서 배울 점들이 있다는 말이다.
송태준 작가는 “동물에게 배우는 생존의 지혜”라는 책에서 비둘기, 참새, 타조, 고양이, 코알라, 치타 등 여러 동물의 생존 방식과 생태를 통해 사람이 배워야 할 점을 설명했다.
오늘 잠언의 말씀도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개미로부터 지혜를 배울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개미에게 배울 점은 두 가지다. 먼저는 준비성이다. 개미의 종류가 1만 종이 넘기에 잠언 기자가 어떤 종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모든 개미가 기자의 말처럼 준비성이 철저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 안에서 개미는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기 위해, 또 그 양식으로 겨울을 나기 위해 가장 뜨거운 여름에 일을 한다. 유명한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그런 개미의 속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인생에 적용할만한 점은 바로 내일의 즐거움을 위해 오늘의 괴로움을 선택하는 것이다. 현재 인류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전쟁, 전염병, 천재지변, 경제불황 등이 사회와 국가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이런 겨울을 잘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지난 3년간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의 폭염 기간에 겨울, 곧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 시기에 지혜롭게 준비했다면 이 혹독한 겨울을 잘 견디고, 나아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사람이 개미에게 배울 점은 자발성이다. 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없지만 개미는 열심히 일한다. 컨트롤 타워가 없지만 동료들과 협력하여 성실하게 일한다. 물론 개중에는 극소수의 게으른 개미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성실하게 일한다. 개미는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으로 일한다.
목회자로서 나의 관심은 어떻게 해야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고, 사랑과 믿음 안에서 더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나름대로 열심을 내어 노력하지만 다양한 한계 앞에 좌절할 때가 있다.
그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은 성도들이 자발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주님 안에 머물기를 애쓸 때, 풍성한 영적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개미를 보며 그들의 준비성과 자발성을 배워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고자 주의 보좌로 힘써 나아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고통 중에 붙잡아야 할 두 가지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편 6:2,4)
“Be merciful to me, LORD, for I am faint; O LORD, heal me, for my bones are in agony. Turn, O LORD, and deliver me; save me because of your unfailing love”
생물학적으로 사람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경험할 때 몸을 떤다. 신체가 위협을 감지하면 신경계가 작동하고 곧이어 아드레날린을 비롯한 스트레스 호르몬을 생성한다. 이것이 근육을 굳게 만들고 떨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 시편의 기자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수척하였고, 뼈가 떨린다는 말로 자신의 불안한 상황을 표현한다. 뼈와 영혼이 떨릴 정도로 두려운 상황에 부닥친 기자는 두 가지를 붙잡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라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붙잡으라는 주변인의 조언은 너무나 당연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고 나름의 노력을 했기에 감동이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신뢰하고 붙잡아야 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견고한 진리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결코 변하거나 쇠하지 않는다.
우리도 간혹 뼈와 영혼이 떨릴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경험한다. 그때 바라고 붙잡는 것이 우리가 신으로 여기고 섬기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설령 하나님을 의지한다 해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의 은혜와 사랑을 붙잡으려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본 후에 정 안돼서 최후의 보루로 하나님을 붙잡으려 한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잦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최우선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붙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제껏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의지해왔다. 대적하는 자들을 무력으로 몰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했다.
남유다의 13대 왕 히스기야는 열왕기의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5-6)
그가 인정과 칭찬을 받은 부분은 군사, 외교, 정치, 경제와 관련된 성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그의 백성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는지를 중히 여기신다.
시편 기자를 본받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붙잡을 수 있길 바란다. 이 튼튼한 두 기둥을 붙잡을 때, 그 어떤 풍파도 견뎌낼 수 있다. 고통과 두려움의 떨림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감사의 떨림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던 떨림은 대적에게 옮겨갈 줄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