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휩쓴 COVID-19로 인해 3년 7개월 만에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우리를 후원해 주시는 교회에서 그동안의 선교 보고를 드리고 또 오클랜드에서 직장을 다니는 둘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베트남으로 돌아가기 전 오클랜드에서 평소 가까이 지내던 목사님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어 약속 장소에 갔더니 베트남 식당이었다. 나는 베트남에 있다 온 사람을 베트남 식당에서 만나자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국 사람들이 만남을 위해 자주 모이는 음식점 중 한 곳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베트남 음식이 외국인들에게도 자주 찾는 음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베트남 식당에 온 김에 베트남 현지인들이 즐겨 먹는 퍼(Pho)를 주문하였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다만 값이 베트남 현지에서 먹을 때보다 5배 이상 비싼 것이 흠이었다. 퍼(Pho)는 한국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쌀국수이다.
퍼(Pho)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100년 전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 북부 남딘 지방의 항구에서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간편하게 한 끼 식사로 때우며 먹던 저렴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당시 부두 노동자들이 먹던 쌀국수에는 채소와 값싼 해산물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본 한 프랑스인 지주가 하인에게 자신의 입맛에 맞게 쌀국수에 소고기를 넣어서 만들어보라고 하였다.
그동안은 농경 국가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소를 함부로 먹을 수 없었다. 그 후 소뼈를 푹 고아낸 국물에 국수를 말고 소고기 살코기를 고명으로 얹어 먹게 된 것이 지금의 소고기 쌀국수의 기원이라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즐겨 먹는 야채수프(pot au feu)에서 그 이름 퍼(Pho)가 파생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방은 소고기 뼈를 푹 고아서 육수를 우려내는 데 반해 하노이를 비롯한 북부 지방은 주로 닭고기 뼈를 푹 고아서 육수를 만드는 차이가 있다. 호치민보다 남쪽의 메콩 델타 지역에서는 육류 대신 민물 생선과 새우 등의 해산물 쌀국수가 유명하다.
퍼(Pho)라고 하더라도 고명으로 얹어 먹는 음식은 지역마다 확연히 다르다. 당면처럼 얇고 투명한 쌀국수 후 티유 Hu tieu, 한국의 수제비 반죽 같은 쫄깃한 분 목(Bun Moc), 스파게티 면처럼 둥글고 다소 두꺼우면서도 얼큰한 국물이 일품인 분 보 후에(Bun Bo Hue), 그 외에 반 깐(Banh Canh), 분 리우(Bun Rieu) 등등 국물이 있는 국수 종류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국물 없이 소스에 찍어 먹고 비벼 먹는 쌀국수를 더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음식은 그 나라의 기후, 날씨, 자연환경, 문화와 역사, 사회 현상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기에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그 이면에 스며든 다양한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베트남 사람을 이해하고 복음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된다.
사회주의 국가이자 아직 기독교 불모지인 베트남에서 4만 명 규모의 기독교 전도 집회가 지난 3월 4-5일 이틀간 호치민 시의 푸토 스타디움에서 ‘Spring Love Festival’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베트남 정부가 성탄절 등 종교적 공휴일을 제외한 날에 종교 집회를 허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집회의 주 강사로 미국의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설교했으며 현지 유명 기독 예술인들이 공연에 참여하였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측은 이날 4,300여 명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하였으며 집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과 희망, 용서’란 주제로 진행되었다. 이번 집회를 위해 300개 이상의 베트남 교회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세계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이기에 베트남 공산 정부도 조금씩 개방의 문을 열고 민중들의 열망을 거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세계 복음화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이지만 우리의 역량은 제한되어 있기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을 주목하는 이유는 베트남은 인구 1억 명에 육박하면서도 아직 개신교 신자는 불과 1.5% 정도에 불과하다. 베트남은 풍요로운 자원, 가파른 경제성장, 젊은 생산 인구, 그리고 강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많은 나라이지만 여전히 복음의 사각지대인 Window 10/40의 동부에 위치해 있다. 국토의 오른쪽은 해안가를 접하는 길쭉한 모양의 지형,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유교와 불교문화가 혼재한 문화는 한국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베트남은 지정학적으로는 가까운 중국의 오랜 지배와 잦은 침략을 겪었고 프랑스로부터 60여 년의 식민시대를 겪었으며 미국과 10년 전쟁 등 외세와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살아남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최초의 기독교 선교는 16세기 중엽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신교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은 1911년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 베트남 정부가 인정하는 개신교 공식 교단으로 존재하고 있다.
1975년 공산화가 될 무렵에는 약 10만 명의 성도가 있었고 현재는 1.5%인 약 150만 명 이상의 개신교 신자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개신교 신자의 2/3는 산지의 소수민족 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 헌법 제70 조에는 신앙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형식적으로는 보장되어 있지만 베트남 공산당의 방침은 “종교를 옹호함으로써 국법을 위반하지 말 것. 종교 집단은 당국의 허가를 받을 것.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은 연수 허가를 받기 전에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입증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베트남 선교를 위해서는 몇 가지 넘어야 할 관문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현지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베트남어는 6개 성조가 있어서 외국인이 습득하기에 결코 쉬운 언어가 아니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야만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질 수 있기에 복음 전도자에게는 꼭 넘어서야 할 장벽이다.
다음으로 조상숭배 사상이다. 현장 선교사들은 베트남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조상숭배를 꼽는다. 도처에 산당이 있고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올리는 제단이 거의 모든 가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종교에 대한 제제가 예상외로 크다. 모든 선교활동은 정부 통제 하에 있으며 종교가 사회주의 이념과 국가 제도권 안에서 움직여야 하기에 통제가 심하다. 따라서 베트남을 바로 아는 것이 베트남 선교의 첩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베트남인들에게 효과적인 선교적 접근을 위해서는 베트남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섬기는 선교가 되어야 그들의 마음 문을 열 수가 있다. 베트남 사회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어느 나라보다도 가족 중심의 문화이다. 이는 마치 고구마 줄기와 같아서 혈연과 지연 중심으로 점진적인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복음 전도에도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미래 베트남 교회를 짊어질 지도자 양성은 절실하다. 대학생 사역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현장이다.
현재 한국에 유학 와 있는 베트남 젊은이들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들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할 수 있다면 미래 이들을 통하여 베트남 복음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인들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인도차이나반도와 어둠의 장막인 Window 10/40에 선교적 나라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복음을 심는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