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of 19th-century illustration by North Wind Picture Archives/Alamy Stock Photo
신정론(神正論, Theodicy)에 대하여
뉴질랜드의 태풍 피해와 튀르키예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 삶에 대한 회의가 마음속을 엄습합니다. 인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나고도 무시무시한 대규모 재앙(전쟁, 전염병, 지진, 가뭄, 쓰나미, 대형 화재)이 발생할 때 자연히 그 이유와 원인을 찾기 마련입니다.
대재앙이 발생하게 된 인간의 책임이나 정부의 역할, 또는 한 사회의 재난 방재 시스템의 한계 안에서 그 해답을 찾기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자연히 이런 대재앙이 발생하게 된 하나님의 섭리나 뜻을 찾기 시작합니다.
리스본의 대지진
“…이는 5세기 로마의 몰락 이래로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참사다.”라고 평가받지만, 동시에 “유럽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1755년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755년 당시 리스본은 유럽에서 손꼽히던 항구로 브라질에서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포르투갈 최대의 수도였습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영국 런던 다음으로 번화한 도시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과 같은 거대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신론이나 우상숭배, 물질적인 탐욕이나 동성애와 같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악과 전혀 무관한 도시였지요.
당시 리스본은 가장 기독교적인 도시로서 12세기 이후로 지어진 주교좌 성당 이외에 교구 성당이 40군데가 넘었고, 90개의 수도원과 150곳의 수도회들을 갖추고 있었으며, 전체 인구 25만 명 중에서 약 10%가 수도사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755년 11월 1일 일요일은 가톨릭을 위해 희생했던 성인들을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All Saints’ Day)로 모든 신앙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당시 교회력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지키던 축일이었기 때문에 이날 하루 모든 경제활동은 중단되었고 리스본에 거주하던 대부분 사람은 미사 시작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성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진학자들이 리히터 규모 8.5~9.0에 추정하는 첫 지진이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된 이래 여러 차례 여진이 리스본 전체를 강타하면서 지진 발생 25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리스본 도시 전체를 폐허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리스본 도시 곁을 흐르던 테주 강변의 히베이라 왕궁과 세관, 오페라 극장, 수많은 대 저택과 고급 빌라들 그리고 예배를 위해 모여있던 성당들이 순식간에 붕괴되면서 그 건물 아래 머물러 있던 수많은 사람이 건물더미에 깔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했던 장엄한 촛대들은 지진에 쓰러지며 거꾸로 도시를 집어삼키는 화마로 변해 무너진 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도시 안에서는 생명의 빛이 보이지 않아 안전한 곳을 찾아 항구의 공터로 몰려간 사람들은 괴이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바닷물이 저 멀리 물러나면서 맨땅이 드러나 옛날에 침몰했던 배와 화물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지진이 시작된 지 90분 뒤에 밀어닥친 세 차례의 해일은 채 5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리스본 바닷가에 있던 모든 것들을 휩쓸어갔으며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익사합니다.
800년 역사의 리스본은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해
정확한 피해 통계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 지진으로 6일간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하면서 리스본 시민 25만 명의 최대 16퍼센트인 3~4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도시 건물의 85%가 파괴되어 800년 역사를 자랑하던 리스본은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도시가 초토화가 된 것도 모자라 감옥이 파괴되어 범죄자들이 마구 뛰쳐나오며 자연재해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도시를 더욱 악화시켰고, 리스본이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에 몰려온 강도와 범죄자들이 넘쳐나 한때 아름다웠던 수도 리스본은 곳곳에서 약탈, 강간, 방화 행위가 잇따라 그야말로 혼돈과 무질서의 도가니 자체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지독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한 지역은 바로 매춘굴이었던 알파마였습니다. 성스러운 도시 리스본에서 유일하게 죄악으로 가득 찬 지역만이 화를 면했습니다. 일반 시민과 성직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형벌을 어찌 대처해야 하오?”
“폐하, 죽은 자는 묻고 산자에겐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응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형벌을 어찌 대처해야 하오? 카르발류는 대답했다. “폐하, 죽은 자는 묻고 산자에겐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국왕 동 주제 1세(D. José I)와 총리 카르발류(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는 지진 패해 수습에 힘을 모았습니다. 총리는 시신을 처리해 전염병을 막고, 이재민 구호에 나서야 한다고 주제 1세에 보고합니다. 왕은 총리에 전권을 맡기지요. 가장 먼저 리스본 대주교에게 요청, 전통적인 장례의식을 생략하고 시신을 즉시 수장하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그리고 지방에 주둔하는 군 병력을 리스본으로 불러들여 공포에 질린 시민들을 안정시키고 치안 질서를 유지합니다. 또 폐허 속에서 약탈·방화 행위를 일삼는 자들을 처벌합니다. 도시 곳곳에 교수대를 세워 범죄자들을 본보기로 목매달았지요.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 공포가 사라지게 했던 셈입니다.
무너진 리스본의 재건을 위해 한 달 만에 재건 계획을 발표하고 동시에 도시 계획법을 제정합니다. 모든 건물은 4층 이상 지을 수 없었고, “가이올라”라는 신 건축 공법을 도입해 건물 벽에 완충재의 목적으로 목제 프레임을 X자형으로 댄 뒤에 그사이를 벽돌과 석재, 회반죽으로 채우는 형식입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리스본의 모든 건물에 내진설계를 의무화한 건축법이 처음 마련된 것입니다.
또한 거리에 잔해가 쌓이더라도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도록 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넓은 모양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7개의 대로가 18m 폭으로 깔렸으며 동서 방향으로는 12m의 폭으로 유지되었습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코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이 재건된 것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카르발류 총리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도가 아닌 인간의 창의력”이라며 지진 피해를 조사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전국 모든 교구에 지진에 관한 13개의 질문이 적힌 설문지를 돌립니다.
“몇 시에 지진이 시작되었고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가?”, “진동이 특히 강하게 느껴지는 방향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방향이 따로 있었는가?” “바닷물이 처음에 솟아올랐는가? 가라앉았는가?” 등을 물었지요. 이는 “…세계 최초로 지진에 관한 객관적 설문조사를 실시한 공식적 시도였다”는 평을 받습니다.
과거 리스본은 가톨릭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대지진 이후 리스본은 과거 교회 권력에 대한 정교 분리, 예수회 추방, 노예제 철폐, 군대와 교육 개혁, 도시공학과 건축학의 발전, 재난 관리의 실제적 대처와 국제 공조 시스템 등 근대 국가의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재앙의 극복은 교회에서 국가 중심으로 바뀌었고, 리스본 대지진의 수습과정을 보며 많은 유럽국가들은 사회제도와 도시를 재정비하였습니다. 이것이 리스본 대지진을 “유럽 근대화의 출발점”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한편, 리스본 지진 기사와 판화를 접한 유럽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공포와 혼란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자비로운 하나님이 수천, 수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미사가 열리는 성소 폐허에 깔려 죽게 하고 성난 파도와 화마의 불길로 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신앙의 도시로 유명한 리스본에서 어떻게 그런 끔찍한 재앙이 발생할 수 있을까?
특히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서서히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이성과 탐구정신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삐뚤어진 인간을 향한 신의 심판”이라는 성직자의 목소리를 철학자들은 더 이상 수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독일의 과학적 지리학과 지진학의 시작”
임마누엘 칸트는 리스본 대지진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지진 이론을 과학적으로 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과학의 용어로 지진을 설명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후대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은 “독일의 과학적 지리학과 지진학의 시작”이라고 평했습니다. 물론 책의 내용은 뜨거운 가스로 가득 찬 거대한 동굴의 이동이 지진을 불렀다는 등 황당한 이론으로 가득했지만, 칸트 이후로 학자들은 지진을 이성과 지성으로 분석하기 시작했지요.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신께서 그림자처럼 세상만사를 관장하고 계신다’는 신정론(theodicy)을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Poeme sur le desastre de Lisbonne)로 공격합니다. 볼테르는 신의 존재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신이 있다면, 리스본의 성당을 무너뜨리고 집창촌을 온전하게 둘 수 있겠느냐?”는 메시지였지요.
더 나아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 신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이라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 선언합니다. 전 유럽이 그의 사상에 열광합니다. 이처럼 유럽 지성인들에 리스본 대지진은 사상의 전환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재앙은 역사를 정지시키는 폭력이 아니라 때론 큰 진보를 낳았음을 인류는 증명해 냅니다.
교회가 고난과 재앙 향한 하나님의 올바른 뜻 해석해야
반면에 이러한 대재앙 앞에서 교회가 동원하는 신학적인 논리가 다분히 인과응보의 차원을 넘지 못할 때 교회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제대로 내밀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이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심을 믿는 교회로서는 당연히 이 고난과 대재앙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해석하여 선포할 책임이 있습니다.
역사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학은 이런 질문을 품고 교회에 나오며 성경을 펼쳐 들고 하나님의 불가해한 섭리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성경적인 해답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런 책임 앞에서 만일 교회가 고난과 대재앙을 향한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해석해 내지 못하고 올바로 선포하지 못할 때, 교회는 세속사회로부터 매우 심각한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 출처 :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니콜라스 시라디 / 강경이 역 | 에코의서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