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다 한번 흘러간 물은 뒤돌아 갈 수 없다. 지나간 시간은 좋았던 싫었던 흘러간 것이다. 과거의 영광에 매이면 현실을 부인하게 되고, 과거의 상처에 매이면 분노와 원망으로 말년까지 망치게 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툴툴 털고 일어나야 말년의 삶을 아름답게 디자인할 수 있다.
내 안에 들어 있던 포장된 나를 걷어내는 데 꼬박 2년 걸렸다. 나 스스로를 자책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려고 했던 억지 희생들, 오직 주의 은혜로 이루어진 목회 성과들을 내가 다른 사람과는 조금은 달라서 잘된 일이라고 착각한 일들, 교회는 오직 주의 것인데 조금 무언가 성취된 교회를 놓고 ‘우리 교회 우리 교회’를 외치며 헛된 자부심과 자랑에 사로 잡혀있던 허세들, 스스로 나를 속이고 있던 허세와 허풍과 교만을 벗겨 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때론 단절된 외로움은 보약이다. 확실히 비워져야 채워진다. 가짜가 걷히니까 진짜가 채워진다. 거짓으로 포장된 나를 걷어 내니까 진짜의 내가 보이고, 살아보고 싶은 나의 실체가 나를 찾아왔다. 집 나가서 떠돌던 내가 나를 찾아왔다. 흘려보낼 것들을 흘려보내니 내가 살아보고 싶은 나를 살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솔직하기로 했다 은퇴 전에는 전력을 다해야 목회가 가능했다. 아침 눈뜨기 시작해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오직 교회와 성도들 생각뿐이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직업이 그러하겠지만 목회는 영혼을 불태우지 않으면 영혼을 돌볼 수 없는 무거운 직업이다. 특히 이민목회는 엄청난 헌신을 요구받는다. 3D 직종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수많은 이들이 사명 받았다가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뜻을 접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목회자들이 존경스럽다. 아무튼 전력을 다해서 목회했다. 후회 없고 아쉬움 없이 최선을 다했다. 은퇴 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인생 전략을 새롭게 짰다. 잘 놀기 1/3, 잘 일하기 1/3, 잘 헌신하기 1/3 전략이다.
잘 놀기로 했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은퇴 전에는 주의 일이 최우선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뒷전이었다. 하지만 삶을 일단락 짓고 제2의 삶을 선택한 지금의 우선순위는 달라졌다. 잘 노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었다. 놀이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것이 놀이라고 생각한다. 놀이는 꽉 들어찬 생각을 비워내는 시간이고, 결과에 매이지 않고 창조적인 일들을 해보는 시간이고,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고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해 보는 자유의 시간이다.
그래서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 거짓 놀이는 즐겁지 않은데 즐거운 척하면서 하는 놀이이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손대는 순간부터 한없이 자유롭고, 설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그 무슨 결과와 상관없이 그냥 그 일을 하는 자체가 즐거우면 그것은 그 사람의 놀이다.
나의 놀이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것, 아무도 하지 않은 일들을 찾아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무장해제를 하고 만날 수 있는 친구들과 골프를 하는 것이다.
내가 35년간 롱런할 수 있었던 비법 중의 하나는 월요일만은 가족의 허락을 받아 나의 놀이에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나만의 설레이는 것, 그 하나만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실제적으로 누림으로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들이 있어야 숨 쉬고 일할 수 있게 된다.
80까지는 생산적인 일, 즉 생계를 위해서 돈 버는 일을 하기로 했다
골프를 치면서 보니까, 80이 다 된 사람들도 빵빵 친다. 비거리가 나보다 더 나간다. 건강관리만 잘하면 80이 넘을 때까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목회할 때는 돈을 생각하는 것은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됐다.
목사가 돈을 계산하고 은퇴 후의 생계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인처럼 느껴져서 십일조 내는 것조차 아내가 관리하게 하고 돈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은퇴 후의 삶에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았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뿐이었다.
그런데 은퇴가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보니 심각했다. 한국교회는 은퇴 후에 무엇인가 있는데 이민 목회는 국물도 없다.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은퇴 후의 삶이 비참해질 수 있다는 절박감이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나 같은 경우에는 부모 형제들의 도움으로 SEED MONEY가 해결되어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만약 집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지금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오늘날 왜 젊은이들이 목회자 되는 일을 피하고 있는가? 뉴질랜드 장로교회의 경우 교사나 경찰관 수준의 연봉을 책정한다. 그들이 뉴질랜드 중산층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목회자들에게 기본적으로 해주어야 할 것을 정당하게 감당해 주어야 마땅하다. 다음 세대 중고등부 사역자들이 왜 이렇게 없는가?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3만 불 내외의 학자금 융자 빚을 안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먹고살 수 있는 풀타임 사역도 아니고, 파트타임으로 고용하면서 시간도 빼앗고, 헌신과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 누가 버틸 수 있는가? 다음 세대 사역자들을 양성하려면 풀타임 사역자로 고용해야 한다. 그렇게 할 형편이 못 되면 주말 이외의 시간에 이중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하거나 다른 무언가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도록 시간적인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는 35년 동안 교회가 주는 사례비로 생활했다.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평생 사례비 때문에 시달렸다. 아무리 양보해도 사례비에 대한 구설수는 끊임이 없었다. 은퇴 후 나는 우버 기사로서 일하고, 아내는 Kindergarten Reliever로 일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받았던 사례비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 열심히 일하면 살 만하다. 은퇴 후에 가장 평안한 일은 사례비에 시달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일이다. 교회들이 기본적으로 지킬 것은 지켰으면 좋겠다.
주의 일, 100%에서 1/3로 줄었다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다. 은퇴 후에 가장 충격적인 일은 주를 위해서 일하는 시간이 1/3로 줄었다는 사실이다. 평생 주를 위해서 일하다가 죽을 줄 알았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 이외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죄악으로 생각했다. 주님께 목회자로 바쳐졌으니 주님을 위하여 나의 삶 전부를 죽을 때까지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퇴라는 현실과 맞닥뜨리니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선배 목사의 고백처럼 ‘주일이 되면 갈 교회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은퇴 목사의 비애이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듯, 은퇴 목사는 혹시라도 민폐가 될까 봐, 혹시라도 나 때문에 작은 분란이라도 일어날까 봐, 시무하던 교회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가서도 안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은퇴자를 위한 교회를 세울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지금은 목사들의 고민 상담, 자기 관리와 개발, 은퇴 준비 등을 돕기 위한 ‘이민목회개발연구소’도 고민 중이다.
은퇴 후 많은 교회들을 순례했다. Majestic, Vineyard, Arise, Impact, Celebration, 감리교, 성결교, 장로교 등등 뉴질랜드의 다양한 교회들을 방문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잘 맞는 교회를 찾아냈다. 장로교 전통의 신학적인 바탕 위에 성령을 사모하는, 살아 역사하는 교회이다. 그래서 집도 그 교회 근처로 이사를 했다.
이제는 사례비와 상관없이 재능기부 차원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언어 문화적인 갭이 있지만 현지인들과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개척이 되고 있다. 나이가 젊어도 생각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 노인이고, 나이가 많아도 생각하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이는 청년이다. 나는 영원한 청년으로 살고자 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가는 일은 인생을 싱싱하게 그리고 풍요롭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