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

처음 낮은 마음 사역을 준비하던 시기, 내가 속한 교회의 어느 성도께서 내게 당부하듯(?) 전하셨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의 취지는 이러했다.

빈곤 문제는 기독교의 복음 전파 소명에 있어서나 아니면 구제의 가시적 성과에 있어서도 전통적 선교 전략에 비추어 그 중요도가 크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선교적 사명이 다른 어느 것에 비해서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던 중에 나온 말씀이었다.

‘가난은 우리 사회 뿐 아닌 역사적으로도 단 한 차례 극복 되어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부연 설명은 내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은 쐐기 와도 같았다.

실제 그 속담은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 가난은 극복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던 말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가난은 노력하는 누군가에게는 극복할 수 있는 선택적 여건일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땅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숙명처럼 우리 또는 우리 곁 누군가는 반드시 짊어지고 가야 할 고난인 것일까?

급한 성미를 이기지 못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는 가난에 대한 전제는 과거에는 옳은 명제였다. 어느 시대에나(심지어 노예제 아래에서도) 개인의 능력이 출중해 모든 역경을 이기고 출세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소수의 미담은 확인할 수 있지만, 모두가 가난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살았다는 기록은 우리 인류의 역사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경제학의 용어를 굳이 빌리자면 시대를 통틀어 당대의 인류가 생산했던 재화는 언제나 “가난하지 않음”을 결정지을 수 있는 수요에 미치지 못했고, 그로써 누군가는 반드시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난을 극복할 부의 총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가난은 극복될 수 있을까?
“빈곤의 종말”을 쓴 미국의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Jeffrey D. Sachs)는 그의 책과 여러 기고를 통해 상위 1%가 독점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절대적 부 즉, 다시 말해 부의 총량이 절대 빈곤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정도 이상으로 증가했기에 이제 분배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중심에 가져다 놓을 수 있고 국제 공조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빈곤의 종말을 우리 시대 조금 구체적으로는 2030년에는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시대의 부의 총량은 이미 모든 가난을 해소하고 남음이 있지만 그 분배에 있어 지속적인 실패를 경험하고 있으니 우리가 그 문제에 더 집중하고 노력할 수 있다면 빈곤의 종말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삭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점차 개선되어가는 빈곤의 비율에도 불구하고 하루 한 가정이 미화 2-10달러로 살아가는 인구가 여전히 세계인구(80억)의 40%(30억 이상)라는 사실과 코비드 상황 이후 굶주림으로 사라지는 생명이 6배 가까이 증가해 1분에 11명에 달한다는 옥스팜의 통계는 그의 희망적인 주장에 반해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짓누르고 있다.

절대적 빈곤 그리고 상대적 빈곤
가난은 정말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위에 기술한 배경을 이해하면서도 이 질문을 다시 우리 뉴질랜드 한인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던져보는 것은, 빈곤과 가난에 대해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너무도 무심히 다루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도래할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가능하겠는가 하는 근본적 질문이 사라진 사회에서 그 과정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은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보다 실질적 질문은 무의미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다시금 그 질문 앞에 서야 할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에 앞서 우리는 이 글에서 정의하고자 하는 가난 또는 빈곤의 의미가 독자 개인이 생각하고 있는 그 의미와 동일한지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 뉴질랜드 사회에서의 가난을 이해하면서 독자들의 시선이 하루 2달러의 소득을 기준으로 하는 절대 빈곤의 기준에 머물러 있다면 이 글의 연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빈곤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우리 이웃의 빈곤은 형태적으로나 그 내면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절대빈곤의 인식과는 다른 실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뉴질랜드 안에서 절대적 빈곤이 한인 사회와 현지인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의 작은 일부분에 남아 일시적이고 특수한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질적 기아가 나타나는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을 중심으로 중국, 인도 그리고 남미의 일부 국가들의 절대적 빈곤 상태와는 다르게 경제적 선진화를 이룬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빈곤은 그 양상이 다르게 전개되곤 한다.

그 사회 또는 국가가 보유한 부의 총량과 일반적인 개인의 평균 소득 모두가 절대적 빈곤의 기준을 상회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결핍의 문제는 그렇기에 사회적으로는 보다 복잡하고 인식하기 어려운 문제처럼 보인다.

이렇게 한 사회의 빈곤 문제가 상대적으로 인식되는 가난은 이제 수치로 계측 가능한 가난의 영역을 벗어나 개인이 소속된 사회에서의 위치와 그 위치로부터 느끼는 삶의 존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등 복합적으로 연계되는 새로운 빈곤의 정의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가난은 그렇기에 경제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고 배고픔의 문제를 넘어 소외와 차별의 문제로 그 무게 중심을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소외의 문제는 우리가 오늘 다루고 있는 절대적 또는 상대적 빈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특징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개인의 경험 차원에서 볼 때 상대적 빈곤 상태에서 경험하는 소외의 문제가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의 문제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보고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절대적 빈곤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이 소외의 문제는 동일 국가 또는 사회 안에서 집단적으로 보여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상대적 빈곤 상황에서 이 문제는 지극히 개인 또는 그 가족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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