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는 이름 앞에 호칭을 붙여 사람을 부른다. 엠(동생) 아잉(형, 오빠) 지(누나, 언니) 옹(할아버지) 바(할머니) 박(아저씨) 등… 베트남 사람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호치민’을 부를 때도 호칭을 앞에 붙여 ‘박호’라고 한다. 우리 말로 표현하면 ‘호’아저씨라는 친근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만난 젊은 학생들은 내 이름 앞에 옹(翁)자를 붙여 ‘옹 데이빗’으로 부른다. 한국말로는 데이빗 할아버지인 셈이다. 나는 아직 젊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나이든 어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도 이렇게 불러준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베트남 교회에서도 예배 순서를 맡아 주보에 이름이 게재될 때면 항상 이 호칭이 따라붙는다. 함께 동역하는 이곳 선교단체 사역자들 대부분이 젊은 세대이다 보니 우리 위치가 삼촌이나 부모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으면 그들에게 근엄한 목사보다 친근한 삼촌이나 할아버지, 마음 따뜻한 숙모나 할머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베트남 정착 초기 하노이에서 지낼 때 대중교통인 시내 버스를 자주 이용하곤 하였는데 우리 부부가 버스에 오르면 청년 학생들이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을 자주 경험하곤 하였다. 이처럼 베트남에는 아직 어른을 존중하는 유교 문화가 남아 있어 늦깎이 선교사도 활동하기 불편하지만은 않다.
실버 선교사로 준비할 것들
30대 초반 목회자의 신분으로 뉴질랜드에 와 남섬 Oxford에 있는 YWAM Base에서 DTS 선교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이민교회 목회자로 25여년 사역하다 조기 은퇴를 하고 늦깎이로 베트남 선교 현장에 온지 3년을 넘어서고 있다.
돌아보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의 이민 목회가 보람과 함께 매순간 도전의 시간이었다면 중년을 훌쩍 넘어 시작된 이곳 베트남 선교사역은 또 다른 차원의 도전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처음 겪는 더위와의 싸움이 그러하다. 동남아처럼 열대 기후에 속하는 나라에다 의료 시설이 열악한 지역에서의 사역은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면 버텨내기 쉽지 않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한 아내의 건강도 영향을 미치기에 선교사의 건강은 사역지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50대 이후 선교사로 나가려는 분이 있다면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고 또 유지하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준비라 할 수 있겠다.
선교사역에 필요한 후원자들의 협력 또한 중요하다. 경제적인 안정없이 선교를 지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교사역을 이해하고 돕는 후원자를 확보하는 것은 영적전투를 준비하는 과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이민 목회를 하는 동안에는 딸들이 어려 부모의 돌봄이 필요하였지만 지금은 두 딸이 모두 성년이 되어 각자 일을 하면서 우리 부부의 선교사역을 여러 모양으로 적극 지원하는 후원자가 된 것은 참 든든하고 고마운 일이다.
지금은 미국과 뉴질랜드에 떨어져 있는 자녀들이지만 선교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현장의 생생한 간증을 함께하며 베트남 선교의 동역자가 되어주었다.
또한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목회하는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가족 같은 많은 성도들은 우리 부부의 늦깎이 선교사 삶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기도와 물질로 후원을 해주고 계신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과분하고 감사한 일이다. 기도 동역자들의 지원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우리 모두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하물며 선교현장에선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가 없다. 선교지에서 지쳐 기도할 힘을 잃을 때에도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하고 큰 위로와 함께 다시 힘을 내게 하는 동력이 된다.
다음으로 실버 선교사로서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기독교 선교사의 입국을 원천적으로 제한하거나 강하게 규제하는 나라들도 의사, 교수, 컴퓨터 전문가, 한국어교사, 전수기능 보유자, 체육인, NGO, KOICA(해외봉사단) 등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선교의 문이 열려 있다.
폐쇄된 사회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목회자나 순수 선교사보다는 이러한 전문인 선교사가 사역에서 유용하게 쓰임 받을 영역이 많다.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복음 전도하는 것이 아직도 많은 제재와 감시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현지인들과 만남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천막을 깁는 일을 하면서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한 대표적인 자비량 선교사(Tent-maker)이다. 선교지에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가진 헌신적인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가 필요하다. 오히려 복음에 문을 닫은 국가에서는 전문인 선교사가 더 절실한 상황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0-22).
그런 면에서 선교사로 따로 호칭하지는 않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박항서 감독은 참으로 귀감이 되는 전문인 선교사라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전문적 영역으로 선교지에 기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지인들을 만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고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베트남 같은 공산권 국가에선 가장 바람직한 선교방향이다.
다만 복음전도 활동에 시간적 제약이 있고 깊이 있는 신앙 활동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문인 선교사는 입국조차 어려운 국가에서 그래도 비교적 수월하게 장기적인 체류 비자를 확보할 수 있으며 최소한의 재정적인 자립이 가능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본인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은퇴 후 선교지에 나가려는 분이 있다면 전문성을 가진 기술을 미리 준비하고 경험을 충분히 쌓아 두면 좋겠다. 그리고 전문인 선교사역을 위해서는 분명한 복음의 체험과 주님의 제자를 개인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교회에서의 선교적 훈련이 필수적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목회 현장에 있었다면 교회 공동체의 고유한 역할때문에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목양에 분주할 수밖에 없지만 선교지에 있는 지금은 젊은이 영혼구원에 사역의 초점을 맞출 수 있어서 감사하다. 우리 모두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빚어진 작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걸작품인 우리 모두는 그 고귀함을 발휘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사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2023년 환갑을 맞는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베트남의 젊은이들을 품으며 이웃의 정겨운 할아버지, 할머니로 그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