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0년대 후반에 잠시 강남의 부자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던 사근동에 살았는데 성수대교만 건너면 바로 강남의 대형 부자 교회가 있었다. 워낙 목사님의 설교가 유명해 그 교회에 잠시 다녔다. 재벌, 탤런트, 정치인 등 유명한 사람들이 주로 모인 교회였다.
그런데 매 주일 교회 입구 응달진 곳에 두 다리가 없는 40대 아저씨가 길바닥에 앉아서 찬송을 부르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돈을 주는 사람은 보기가 쉽지 않았다.
간혹 교회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올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당시 경제적으로 늘 빠듯했으나 그분을 외면할 수가 없어 매주 만 원씩을 꼭 드리고 왔다. 회사원인 나에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몇 년간 그분을 늘 챙기다가 38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뉴질랜드에 신학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떠나기 한 달 전에 10만 원을 봉투에 담아 그분에게 드리고 앞으로 나의 계획을 알려 드리려 했다.
그런데 그 주일에 보이지 않았다.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나오지 않으셨다. 내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간다면 앞으로 얼마나 나를 기다릴까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제 딱 한 주일의 기회밖에 없었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그분을 꼭 만나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떠나기 전 마지막 주일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갔으나 그날도 보이지 않았다. 그 참담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어떻게 해야 그분을 만나고 갈 수 있을까? 예배 내내 그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님 제발 제발 그분을 만나게 해주세요.’
예배 내내 눈물로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고 아픈 마음으로 교회를 나와 그분이 구걸하던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놀랍게도 멀리서 그분의 찬송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신없이 달려갔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나는 그분의 두 손을 잡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준비한 봉투를 그분에게 건넸다. 그분은 한참 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울먹이며 내게 말했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아직도 그 손의 온기가 느껴진다.
지금도 가끔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오늘 이 뉴질랜드 땅의 기적은 그분의 눈물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지하도 할머니의 축복의 외침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터뷰를 위하여 한국일보를 찾았다. 지하철을 이용하여 안국역에 내려 지하도 계단을 급히 올라가고 있었다. 한겨울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걸음을 재촉했다.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계단 중간 지점에 80대 할머니 한 분이 추위에 떨며 구걸을 하고 계셨다. 그분의 행색은 너무나 초라했고 그 얼굴에는 지난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짙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지갑을 열고 돈 몇 만 원을 드리고 발걸음을 급히 재촉했다. 기자를 만나 한참 동안 미팅을 한 후에 좀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지하도 계단을 내려왔다.
시간이 꽤 지난 후였는데도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모습이 조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적어도 가장 불쌍한 모습, 가장 간절한 몸짓이어야 그나마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텐데 이 할머니는 연신 담배를 빨며 보란 듯이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조금 큰돈을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한마디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
“할머니! 이렇게 담배를 피우고 계시면 어쩝니까?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 돈을 주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구걸을 제대로 못할까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또 한편으로는 좀 진정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을 탓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내 말을 들으며 담배 연기로 깊은 고통의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어렵게 말을 시작하셨다.
“여보시오, 당신이 내 심정을 알기나 해요? 이렇게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가슴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소. 자식도 다 잃고 어디 있을 곳도 없는 내 심정을 당신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잠시 망치로 맞은 것같이 멍했다.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몇 푼 도와줬다는 그 알량한 교만의 마음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어떻게 해야 할머니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할머니!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린 것은 할머니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입니다. 담배 피우시면 건강을 많이 해칩니다. 앞으로 건강을 위해서 피우지 마세요.”
그러고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위로가 되도록 다시 지갑을 열어 가진 돈을 전부 할머니에게 쥐어 드렸다.
‘건강하세요’ 한마디를 남기고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통수를 향하여 할머니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복 받으시오, 복 많이 받으시오!”
할머니의 외침은 끝이 없었다. 내가 할머니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할머니의 외침은 계속 들려왔다.
바누아투 한 할머니의 유언
남태평양에 바누아투라는 83개의 섬들로 구성된 작은 섬나라가 있다. 오랫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인구는 약 30만 명 정도 된다. 경제적으로는 최빈국 중의 하나다. 이곳에서 선교를 하는 목사님의 초청으로 몇몇 선교지를 방문하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바누아투 사람들의 삶은 더 피폐했다.
수도인 포트빌라라는 조그만 도시를 벗어나 10여 분만 차로 가면 산속 곳곳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으로 착각할 만큼 열악한 그들의 삶을 볼 수 있다. 움막을 짓고 주로 과일이나 나무뿌리 등을 캐서 주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태풍이라도 한번 몰아치면 먹을 것이 없어 많은 고통을 당하곤 했다.
나는 그들을 돕기 위해 현지 선교사님과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마을에 교회를 지어 주고, 조그만 교실들을 지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곳의 마을과 마을 사이에 냇가들이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불어서 왕래가 불가능해 오랜 시간 고립된 삶을 살아야 하는 곳도 있었다.
500여 명이 사는 마을에서는 폭우가 한번 쏟아지면 물이 빠지기만을 며칠 동안 강 건너에서 기다리곤 했다. 매일매일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머리에 큰 짐을 이고 힘겹게 강을 건너는 그분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 다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소원이 생겼다. 다리 건설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으나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구하여 약 5개월 만에 아름다운 다리를 건설했다. 다리 개통일은 큰 축제였다. 전임 수상과 장관들이 와서 축사를 하고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올렸다.
이렇게 하나하나 그분들의 삶의 질을 높여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어느 마을을 방문했을 때에 현지 선교사님이 그곳에 살던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생 극한 가난 속에 살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쌀밥 한번 먹고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6·25 전쟁 직후 태어나 누구보다 배고픔을 겪어온 나에게 이 한마디의 말이 가슴에 맺혔다. 그날 이후 나는 어려운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매번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쌀을 700포대 정도 싣고 마을이 있는 산속들을 찾아다녔다. 쌀 한 포대를 들고 행복해 하는 그분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의 가장 큰 사역은 기아지역의 굶주린 분들에게 양식을 나누는 일이다. ‘선한 일꾼을 찾습니다’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양식을 나누어 줄 현지 선교사님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양식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 30여 곳이 넘는 기아지역과 난민 수용소 등에 계속 양식을 보내고 있다. 육신의 양식을 통해 영원한 양식 되신 주님을 소개할 수 있는 이 일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