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하루하루 생활반경이 좁아지고 있었다. 입장료가 저렴하고 볼거리도 많은 어린이 대공원 내 전시장이나 박물관, 도서관도 휴장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네 놀러 가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홈 베이킹도 하루 이틀이지 말이다.
초여름이 가까워지면서 좋은 날씨에 집 안에만 머무는 게 답답했다. 게다가 은율이는 한창 호기심 불타는 48개월이었다.
나는 파란색의 2인용 원터치 텐트를 하나 주문했다. 은율이가 색깔을 골랐음은 물론이다. 텐트가 도착하자 우리는 신이 났다. 팡! 하며 순식간에 텐트는 펼쳐졌다. 텐트를 거실에 펴고 은율이와 책을 읽었다. 그 안에서 밥도 먹었다. 강아지 하트는 영문도 모른 채 우리의 거실 캠핑에 동참했다.
다음날 나는 아파트 마당에서 캠핑하자며 은율이를 끌고 나왔다. 신이 난 아이는 장난감을 챙겼다. 모래놀이 버킷, 아빠가 마시고 나서 씻어 둔 플라스틱 커피 통, 공룡이랑 곤충 피규어 등이었다.
오래된 아파트 화단에 텐트를 펼쳤고 우리는 텐트 안에서 책을 읽었다. 흙에 물을 붓고 땅도 파보았다. 흙 마당에 세워 둔 공룡이나 피규어는 방안에서 가지고 놀 때 보다 더 생동감 있었다.
어린이집 휴원으로 놀이터를 배회하던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따라 나온 엄마들도 흥미롭게 지켜보다 말을 걸기도 했다. 코로나로 우울하게 지내던 봄날의 따뜻한 추억이다.
은율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겨울왕국>과 <주토피아>다. 주제곡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진짜 안나 공주와 한스 왕자가 된 것처럼 좁은 거실을 빙글빙글 돌아야 하고, 주토피아로 떠나는 토끼 주디처럼 신나게 달리며 춤을 춰야 한다.
마흔이 넘는 엄마는 숨이 차 죽을 지경이지만 마음만은 아이가 되어 같이 신나게 논다. 은율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주고 강아지도 신이나 짖고 달리면 집안은 난리 법석이 되고 남편은 재밌다는 듯 쳐다본다.
은율이와 이렇게 철없이 노는 것을 나는 친정 언니와 오빠에게서 배웠다. 네 살 터울인 언니는 나와 많이 놀아주었다. 옥상 구름을 보며 고래, 강아지를 찾으며 놀았고, 인형 옷을 손바느질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오빠는 녹음기에 본인의 목소리를 녹음해 보물찾기를 지시했다. 동생인 언니와 나는 그 목소리대로 집안 곳곳을 찾아다니며 보물을 찾아다녔다. 도착지에서 오빠가 튀어나온 적도 있다.
거울을 벽에 기울여 세워놓고 바닥에 누우면 바닥이 가파른 경사같이 보인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려 마치 암벽 등산을 하는 것처럼 상상놀이를 했다. 변변한 장난감도 없었지만 우리 남매는 끊임없이 창의적인 놀이를 만들어냈다.
은율이에게 이모가 된 친정 언니는 나와 그랬던 것처럼 은율이와 놀아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조그마한 랜턴을 사서 어스름이 깔려오는 놀이터를 다니며 조카와 탐험 놀이를 한다. “대원! 준비됐나?” “네! 대장!” “그럼 출발!”하며 진지한 탐사대 놀이를 한다. 이를 보던 동네 사내아이들도 호기심이 생겨 쫓아다닌다.
이모 덕분에 은율이는 대원들을 이끄는 수석 요원 자리를 차지하고 오빠들이랑 실컷 뛰어다니며 놀았다.
아이의 감정에 반응해주고 공감해주는 것은 아이에게 행복이라는 씨앗을 심어주는 작업이다.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이고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의 조건을 찾을 수 있는 밝은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부모와 함께 노는 것은 정서, 신체, 두뇌 발달 모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략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아이들이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한다고 한다. 부모와 놀기를 참으로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고 한다.
‘나의 아빠는 좋은 아빠인가?’, ‘엄마와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러면서 부모에게서 멀어질지 아니면 더 친밀해질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다시 한번 각성하게 된다.
지금 한없이 나만을 사랑하며 따르는 딸. “엄마! 같이 춤추자! 엄마! 엄마!” 하는 딸에게 나는 철없는 사랑을 주고 있는가? 아이가 만화 영화 음악을 틀어 놓고 손을 잡아끄는 시절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다. 그때 가서 더 철없이 놀아줄 걸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의 순수한 모습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며 이 시간을 낭비하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관계가 쌓여 아이와 나의 미래의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하면서 1층만을 고집했는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뛰지 마.”라는 말 대신 “공주님, 저와 춤춰요! 드디어 우리가 만났어요!” 하며 나의 꼬마 공주님과 행복한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잠시만 떠올려보자.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 내 아이가 친구가 된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