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창조의 목적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 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 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 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세기 2장 1절-3절)

천지창조는 언제 끝이 났을까요? 여섯째 날이 아니라 일곱 째 날입니다. 2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우리가 알기로는 천지창조는 6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학자들이 2절에 나오는 ‘일곱째 날’이라는 단어를 ‘여섯째 날’로 바꾸어서 해석하려고 시도해 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지창조는 7일 째 완성되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7일 째 하나님께서 하셨던 안식도 창조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안식도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안식에 직접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7일 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7일 째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창조의 진가가 그 7일째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창조의 진가, 창조의 목적은 안식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안식이 필요할까요? 안식 그 자체이신데요. 즉 인간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6일간을 창조하시고 또 7일 째 하나님 스스로가 그 안식에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누리는 안식을 인간도 함께 누리도록 초청한 것이 7일 째의 안식이었습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6일 째 창조되고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안식에 참여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팬데믹 이후로 불안증세와 각종 트라우마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 등이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런 위기는 늘 반복되어 왔습니다. 경제 대공황, 자연재해, 사회적 약탈, 전쟁, 전염병 등. 이런 일들은 인간이 누려야 하는 안식을 많이 앗아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안식이란 있을 수 있을까요?

구원 후 안식
그렇다면 이 안식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구약에서 말하는 안식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명령하는 안식과 신명기에서 명령하는 안식이 다르게 나옵니다.

출애굽기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출애굽기에서는 노동 후 안식, 신명기에서는 구원 후 안식으로 나옵니다.

일차적으로는 노동을 쉬는 안식을 의미하지만 더 깊은 의미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쉬는 안식을 의미합니다. 뒤로 갈수록 계시는 더 발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안식일에 일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비벼서 타작해서 굶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성경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화들짝 놀란 것입니다. ‘저 자가 메시아일 수 없다’라고 단정을 짓는 것입니다. 왜? 율법을 문자적으로 어기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을 계시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꾸 문자적으로 접근을 하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노동의 안식보다 구원의 안식이 훨씬 더 고급한 계시인데 그들은 아직도 노동의 안식에만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안식개념을 위해 노동의 안식을 어기신 것입니다. 노동의 안식을 어길지라도 더 고급한 계시인 구원의 안식을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4:9~11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완벽한 안식이 주어진다는 약속입니다.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일주일마다의 안식의 주기는 언제 완성되는가 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안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완벽한 안식입니다. 천국은 완성된 안식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은 파괴된 곳이니까 장차 다가올 안식만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 영원에 속한 안식은 오늘 이 시간의 세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2장에서 특이한 사실은 여섯째 날까지 반복되어 왔던 표현이 사라진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런 표현이 일곱째 날에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하루하루의 창조를 매듭을 지어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7일 째 안식일은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식은 창조 이후 계속 진행되고 있고 예수님 재림 시에 완벽하게 완성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오늘 나는 이 안식을 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짐을 맡기는 안식
여러분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사는 동안 얼마나 창조의 목적인 안식을 누리고 계십니까?

성 어거스틴에게 친구가 있었습니다. 죽마고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의 마음은 슬픔으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그에게 ‘친구’란 ‘두 몸에 깃들인 하나의 영혼’이라고 할 정도였는데 자신의 영혼 반쪽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는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랑 추억이 담긴 장소로 떠나 보았습니다. 그래도 슬픔은 떠나지 않았고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피해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디에 간들 슬픔을 가진 내가 따라가지 않을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혼은 안식할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다 싫어졌습니다. 빛도 싫어졌습니다. 나는 내 혼이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거기에 두고 싶었으나 그러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이 짐을 가볍게 할 수 있기에 당신에게 내 짐을 맡겼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안식을 우리에게 배분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안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짐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조급함과 초조함과 불안함과 수치심과 분노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사람 안에서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런 안식을 이 땅에서 누리는 사람들이 곧 영원한 안식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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