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스스로 선택하기도 하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어느 순간 결과가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오늘과 내일의 모습은 선택의 결과이다.
선택과 자유의지
컴퓨터의 마우스를 눌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 영상을 봐야 할지 보지 않아야 할지, 이것을 먹어야 할지 먹지 않아야 할지, 이것을 해야 할 것인지 하지 않아야 할 것인지, 그곳을 가야 할지 가지 않아야 할지, 이 사람을 만나야 할지 만나지 말아야 할지, 전화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답을 보내야 할지 보내지 말아야 할지 등등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선택하게 된다.
사람은 본능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라는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프로그래밍 된 로봇이나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하시지 않는다. 자유의지의 능력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놓고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었는데 결정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문제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통한 선택 외에는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운명론을 믿지 않는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잘못된 선택
롯은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인데 하란이 일찍 죽고 아브라함이 롯을 거두어 돌보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롯도 함께 따라나섰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믿고 선택했고, 롯은 아브라함을 선택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중요하다. 축복의 줄기가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롯은 각각 부자가 되었다. 문제는 목축이 주업인 그들에게 갈수록 늘어나는 가축과 제한된 초지와 물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자주 다투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에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 “나를 떠나라. 네가 오른쪽을 선택하면 나는 왼쪽, 네가 왼쪽을 선택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면서 분립할 것을 권했다.
아브라함은 어른이다. 가족과 부족민들의 생사여탈을 좌우할 수 있는 족장이었다. 아브라함이 먼저 목축 경영의 지역을 선택하고 권리를 주장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화평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조카 롯에게 양보했다. 양보라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어른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롯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 있었는지 이것을 기회로 여기고 목초지를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초지도 물도 넉넉했던 요단 지역을 선택했다. 성경은 그 지역이 마치 에덴동산 같았고 풍요의 땅 애굽과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문제는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 보고 선택한 것이다.
창세기 13:12~13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그 말씀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에 계속 머무는 것은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롯은 기회가 왔을 때 더 나은 곳을 찾았다. 천국이라고 선택했지만 지옥을 선택한 것이다. 처음에는 풀과 물이 넉넉한 요단 지역에 머물렀지만 점점 소돔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 롯이 이것을 몰랐을까? 알고 선택한 것이다.
“그 속에서 살아도 내 믿음만 지키면 되니까.” 우리가 뭘 모르고 선택한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알고 선택한다. 자기 생각만 가지고는 올바른 것을 선택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다.
롯은 자기의 대부이며 믿음의 아버지와 같았던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지 않았어야 했다. 잘못된 선택은 후회로 끝나지 않는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질 때 선택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탈출할 때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는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었다.
두 딸과 함께 겨우 목숨만 건질 수 있었고 그 목숨을 구한 것도 아브라함이 롯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서 간신히 생명만 보존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롯은 심판 앞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천사가 그들의 가정을 친히 이끌어 성 밖으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이 자비를 크게 더하셨기 때문이다(창 19:16).
예수님의 선택
아담의 잘못된 선택은 죄와 사망을 불러왔고 인간은 영생의 존재에서 죽음의 존재로 전락했다. 죄로 인한 온갖 부조화와 질병, 고통에 시달리며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죄와 사망의 절망을 풀기 위해 하나님은 선택하셨다. 인간을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성육신을 선택하셨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거리가 되는 고난을 선택하셨다. 대속의 어린양으로 죽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생명이신 분이 죽음과 무덤을 선택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선택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신음에서 벗어나 부활과 영생을 회복하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理性)이 있다. 우리에게는 사고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지성(知性)이 있다. 우리에게는 살면서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본 일을 통해 얻은 경험(經驗)이 있다. 이성, 지성, 경험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으로 뭔가를 판단하고 선택한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 지성, 경험은 완전하지 않다. 확신하는 일조차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뭔가를 판단하고 선택할 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선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선택해야 옳고 안전하다. 하나님은 그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정한 행복과 풍성한 삶을 책임지신다.
유혹은 언제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요단 지역은 소돔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아직 온전히 변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알면서도 선택하지 않는다.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악을 선택한다. 우리 안에 남은 죄의 본성은 언제든지 지옥을 선택하게 한다.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감싼 미끼만 보고 덥석 물 때 끝난 것이다. 미끼와 함께 삼킨 낚싯바늘은 그리 쉽게 빠지지 않는다.
오늘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다. 올바른 선택일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다. 지금 나의 선택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고 기쁨이 없다면 그 선택은 잘못된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결정하고 선택한 후에 마음에 후회가 없고 기쁘다면 그것은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또다시 지옥을 선택할 수는 없다.
오늘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점검과 교정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