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북한지역 선교 역사

3·1 운동은 신분과 직업과 종교를 초월해 민족이 하나라는 민족 공동체성을 태동시켜주는 온 겨레가 일치 단합한 거룩한 운동이었다.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의 공동체성에 대한 자각은 기성의 일부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애국 의지들을 결집시키도록 촉구했고, 한민족의 자긍심을 갖고 교육 언론 문예 학술 종교 산업 각 부문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한편 많은 피해를 입은 기독교는 오히려 대중에게 기독교의 영향력을 증가하여 기독교가 사회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기독교야말로 이 민족의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에 힘입어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민족 복음화만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 기독교 사회문화운동
3·1 운동 이후 기독교는 한국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책임의식을 심어주었다. 젊은이들은 교회와 사회, 교회와 문화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 밀접한 연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같은 교회의 책임의식은 농촌운동, 진흥운동, 절제운동 같은 사회 계몽운동, 청소년운동, 주일학교 육성과 기독교 교육, 해외 선교, 기독교 문화사업과 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당시의 일제의 만행은 기독교 정신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한국민족에 대한 고도의 파괴 공작일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한국 개신교가 추진해왔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반기독교적인 행동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민족계몽 운동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절제운동이었다. 1923년에 조직된 한국기독교 여자 절제회는 금주 금연에서부터 여성의 순결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이 넓었고,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도 교단적인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한국교회가 가장 우려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농촌문제였다. 당시 한국은 전 국민의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교회가 집중적으로 시골에 분포되어 있었다. 한일합방 이후 급속하게 시골이 영세화되고 호남 지방인 경우 전체 농지의 75%가 일제의 손에 넘어가 시골교회들이 재정적으로 교회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YMCA에서는 농촌사역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했으며, 선교사들은 농촌의 열악한 환경을 돕기 위해 농촌문제 전문가를 초청하는 한편 농촌복지를 위해 여러 책들을 발간하였다.

또한 장로교 총회는 1928년 9월에 제17회 총회에서 농촌부를 두기로 결정하고 농촌사업 전문가를 초청하여 <농촌생활>지를 발간하여 신용조합을 설치 보급키로 가결하였다.

3·1 운동 이후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진흥운동 역시 한국교회와 사회를 갱신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진흥운동은 1919년부터 1926년까지 그리고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진흥운동(영적각성 및 부흥운동이며 주일학교를 발전시키기 위한 운동)

장로교/각 노회 대표 3인 구성; 진흥위원회 조직, 4000개 장로교회에서 특별진흥운동 부흥회 개최, 전도지 발간 – 170만부 판매, 평양, 선천, 재령; 수천 수 만명 부흥 사경회, 1919년 1705개 교회, 2277개 교회로 증가, 144,062명 교인 194,498명으로 증가

감리교/교회부흥운동, 전도운동, 전도교육 교역자 양성, 지방 부흥위원회분회 조직, 1921년부터 1924년: 16,613명, 170개 교회 증가

성결교/노방전도, 야시전도, 12개 도시 순회 강연

당시 한국교회는 복음의 본래 사명을 회복하면서 복음을 통한 사회와 문화의 변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교회마다 교인을 위해 문고를 설치하고 교역자를 위한 이동도서관을 설치하며 교파를 초월한 총회적인 차원에서 정기 연구지를 편찬한다는 시행 안을 만들어 실시하는 등, 어두워진 한국 사회와 민족 속에서 교회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한국교회는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3·1 운동 이후 변천하는 사회, 갈등하는 사회
3·1 운동 전후 한국 사회는 물론 한국교회는 놀라운 변천을 맞기 시작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새롭게 발흥하고 있는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과 교회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에서 오는 실망감으로 인한 교회 밖으로부터 비판, 그리고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과 반선교사, 반교권을 외치며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기 시작한 사이비 종파의 등장 같은 교회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경제공황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했고, 반기독교 사상과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반기독교 사상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반기독교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진화론의 부상과 외국의 고등비평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받았다.

러시아의 공산당 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기독교 비판 운동, 기독교 자유주의 사건 등이 그 예이다.

조선사회에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 발흥
조선사회에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이 발흥하기 시작한 것은 3·1 운동 전후의 일이며, 이들은 민족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일어난 후, 1918년 이 혁명에 찬성하는 정치세력들이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무렵 극동지역에는 조선인 25만 명이 거주하였으며,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이들 사회에서 먼저 일어났다.

이후 이들은 상해로 옮겨 가서 그곳에 한인공산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기도했다.

3·1 운동 전후 한국의 일부 신문에는 마르크스 사상의 개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등이 연재되어 사회주의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고, 여러 잡지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당시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지방의 조선인 사회 및 국내에서 여러 개의 공산주의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기독교 운동을 등에 업고 세력을 넓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한국의 장감연합공회는 이미 1924년도 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밀려오는 무신론과 공산주의와 회의주의적인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을 유혹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고 했으며, 코리아 미션 필드(korean Mission Field)지에 “교회는 이제 한국에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민족의 일반적인 태도는 전과 판이하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라 충격이다”라고 토로하였다. 사실 사회주의 만연으로 수많은 젊은 엘리트들이 신앙에서 떠나버렸다.

기독교의 또 하나의 짐
당시 누구 하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파헤쳐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나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시각은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심지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무신론적 토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민족주의 운동, 항일운동의 한 방편으로 주저하지 않고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무신론에 근거한 공산주의가 하나님의 존재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기독교 신앙과 접목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항일운동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민족주의 고취와 함양이라는 측면에서 사상적인 제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박해하고 도전하는 또 다른 사상적인 세력으로 부상해 한국교회는 또 하나의 짐을 떠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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