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조직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된 후 한국교회는 부흥성장되어 1910년 전국의 장로교회는 독노회 산하에 7 대리회(sub-presbytery-경기충청대리회, 평남대리회, 평북대리회, 황해대리회, 전라대리회, 경상대리회, 함경대리회)가 조직되어 관할되었다.
대리회 교세현황
경기충청 | 평남대리회 | 평북대리회 | 황해대리회 | 전라대리회 | 경상대리회 | 함경대리회 |
50교회 | 89교회 | 160교회 | 47교회 | 127교회 | 186교회 | 78교회 |
*일곱 개 대리회에 소속된 교회수: 737교회, 1910년 세례교인수: 32,500명, 교인수: 44,000명
1912년 3월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 후, 9월에 7개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총대 96명(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경창리에 있는 여자성경학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총회장 언더우드)가 결성되었다.
일제의 대한통치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의 명분을 앞세우고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통감부를 설치 후 보통학교의 책임을 일본인이 주관하게 하고 일본어 교육을 강화시키며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설립되어 1910년까지 설립된 학교의 총수는 3,000여개에 달했다.
여기서 교육받은 이들이 국민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885년~1907년 한국에 세워진 대표적 사립학교
평양, 정주, 선천 | 서울 |
숭실, 대성, 오산, 신성 | 배재, 이화, 경신, 정신, 숭의, 흥화, 보성, 양정, 휘문, 진명, 숙명, 중동, 중앙 |
*이들 학교는 새로운 세계관과 국제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과 교육의 목표를 민족 의식 고취에 두었다.
*배일사상이 강한 학교: 평양대성학교, 정주오산, 평양 숭실, 선천 신성학교.
*평양(안창호), 정주(이숭훈), 선천교회(양전백)는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알려짐.
한국 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 고취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기독교였다
1882년부터 출간된 한글성경, 1895년 캐나다 선교사 게일에 의해 번역된 천로역정(Philgrim’s Progress)은 기독교사상 전달뿐 아니라 근대문학을 앞당기게 하였고,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Mission School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기독교 민족주의 의식을 강하게 불어넣었다.
이를 간파한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여 관공립 보통학교에는 일본인 교사를 배치시키고, 사립학교를 일제의 관할 하에 두어 규제하기 시작했다.
사립학교 가운데 일제가 가장 우려하는 하는 것은 서양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에 의해 운영되는 Mission School이었다. 일제는 무단정치를 시행하며 직접 선교사들을 공격하지 못하고 대신 한인교회들에게 노골적인 박해를 가했다.
선교회가 기회 있을 때마다 비정치화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한국교회가 놀랍게 발전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며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선교사들과 국내 기독교인들을 의심해왔다.
하지만 외세의 침략에 대해 통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새 감격과 새 힘을 얻으려 하였고 교회에 들어와 자주성과 자존성을 되찾으려고 애태웠다.
따라서 일제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세력을 재거하지 않고는 한국의 통치를 영구화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헌병제도를 실시하여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고, 투옥, 고문하며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일제가 꾸민 105인 사건을 통하여 한국교회를 말살하려고 하였다.
1915년에는 모든 종교를 정권의 통제 하에 두도록 제정되었고, 학교 교과과정에서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모든 종교 활동이 정부의 재가를 받도록 요구 하였다.
3.1 독립운동
일제의 무단통치는 한국에 대한 민족운동 탄압, 토벌, 첩보수집, 세관감시, 징세독려, 즉결처분 등으로 식민지 수탈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일제의 무단통치 경과
1910년 | 헌병 경찰망 구축, 1,120개소. (1918년 1,825개소) |
1910년 | 토지조사국 설치(1905년 토지조사 착수, 1906년 토지저당 규칙 공포) |
1912년 | 토지조사사업 미명 아래 – 일본인 국내토지 점거 매입 유리, 훈령 제4호 – 확증 없는 사유지 전부 국유지로 편입, 토지 침탈, 상당수 농민들이 화전민으로 전락, 만주로 이주. |
1918년 | 임업조사령 공포 – 임야 일본인들에게 이전, 1911년; 어업령 공포, 일본 어민들의 기득권 인정. |
1915년 | 광업령 발포, 한국인 광산 억제 |
1911년 | 사찰령 발포, 총독부 관할. |
1913년 | 외국 의료선교사 활동 제한 법규제정. |
1915년 | 모든 종교를 정권의 통제 하에 법규제정, 학교교과 과정 종교교육 금지 |
전국적인 수탈과 압박을 체험한 국민들은 독립의 의지를 결연히 다지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 일련의 국제정세는 항일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힘을 결집시켜준 것은 오랫동안 기독교 교육과 교회를 통해 축적되어온 기독교 민족주의 정신이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의 사망은 한국민족에게 충격을 더해주었으며,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의 600명의 한국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국내외에 천명하였다. 국내에서는 서울, 평양, 정주, 세 곳을 중심으로 3.1운동이 추진된 중심지였고, 종교적으로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운동의 축이었으며 비폭력 독립운동(the nonviolent demonstration)이었다.
1919년 2월 상순 중앙학교장 송진우가 현상윤, 최남선과 회합을 갖고 독립선언서, 의견서 및 청원서를 작성키로 하고 구한말 지도자들과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교섭을 하는 한편 불교 측과 힘을 결집하였다.
3월 1일에 민족대표(기독교 측 16인, 천도교 측 15인, 불교 측 2인 총 33인)들은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시민 2만명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의 의사를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파고다 공원은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가 휘날리고 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 전역으로 메아리쳤다.
평양, 진남포, 안주와 의주, 서천, 정주, 원산, 개성 등 전국 여러 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군중들의 만세 소리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당시에 기독교는 민족종교와 같은 힘을 지니고 지식인이나 민중 깊숙이 영향을 주었다.
독립운동 참가 및 피해
독립운동 | 참가자: 총 2,021,448명, 시위운동: 1,542회 |
한국인 피해 | 사망: 7,509명, 부상: 45,562명, 체포: 49,811명, 민가 715채 파손, 교회 47개 파손 및 소실 |
강서사천교회 학살사건, 정주교회 학살사건, 강계교회 학살사건, 위원교회 학살사건, 서울 십자가 사형사건, 북간도 노루바위교회 및 서간도 각지교회 학살사건, 청주오산학교 피소사건, 수원제암리교회 학살사건 |
#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시위운동의 중심세력이라고 지목을 받았던 기독교인들과 교회였다.
이에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심각하게 우려하며, Samuel Hugh Moffett가 말한 것처럼, 일제의 무자비한 폭정과 잔인한 만행을 목도한 선교사들은 “잔인한 만행 앞에는 중립은 없다”(non-neutrality for brutality)며 억압받는 한국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일제의 잔학행위를 본국에 보고하자 미국 선교부는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연구회를 설치하여 The Korean Situation이라는 책자로 만들어 전 세계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이와 함께 미국 내 42개 신구교 교파는 한국 독립을 위해 매일 1회 이상 기도하기로 결의하고 전국교회에 실행을 호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