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기억해야 할 그 곳, 만주: 용정

정착한 땅의 동남쪽인 “고향 조선을 밝힌다”는 ‘명동’<사진 설명/복원된 명동교회, 출처_국립민속박물관>

지난 8월 8일 월요일 저녁 7시, 낮은 마음(대표 이익형 간사) 문화공간 <숨, 쉼>에서 2022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한국의 역사와 현재의 삶을 조명하는 ‘2022 광복절 기념 세미나’가 있었다. “기억해야 할 그 곳, 만주: 용정”에 관한 주제 강연을 한 김형균 박사(한국기독교사 및 선교학 전공)의 원고를 필자의 요약으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많은 사람에게 만주, 간도, 용정과 명동촌은 낯선 지명이다. 우리 선조들의 이민 이야기가 있는 곳이지만 만주와 간도는 소외되고 잊혀가는 땅이 되었다. 그러나 뉴질랜드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100여 년 전 만주, 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만은 않다.

지금 우리가 뉴질랜드에서 이민자로 살면서 한인사회를 꾸려가고,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킴과 동시에 뉴질랜드 현지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간도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우리 선조들의 삶 속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기억해야 할 그곳, 만주의 이야기를 규암 김약연의 삶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만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규암 김약연의 생애는 다시금 나라에 대한 열정과 교회에 대한 희망이 샘솟게 도와주며, 그 실천적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를 위해 우선 여러 지명을 설명하고 그 당시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게 된 시대적 상황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 후, 그 상황 속에서 김약연의 이민과 명동촌의 시작, 명동학교와 명동교회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보통 용정과 명동촌의 이야기를 하면 기독교와 독립운동과 관련되어 연구되고 있지만, 본 글에서는 그 주제들과 더불어서 “이민자”의 삶을 함께 조명해 보고자 한다. 또한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서 본 글이 인용한 각주는 생략하였다.

명동교회 교인들 단체사진. 출처_문익환기념사업회

만주? 간도? 용정? 명동?
만주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중국 땅으로 가장 넓은 범위를 뜻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 안에 간도가 포함이 된다. 간도는 만주보다 좁은 지역으로 보통 압록강과 두만강 접경지역을 뜻하며, 현재 조선족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간도는 위치에 따라서 서간도와 북간도로 또다시 나뉘는데, 압록강 북쪽을 서간도 지역으로, 두만강 위쪽은 북간도라 부른다. 용정과 명동은 북간도 지역의 마을 이름이다.

간도 지역은 청나라와 조선 말기에 “봉금령”을 선포한 후 약 200여 년 동안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 지역이 되는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 지역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69년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사람들이 월강하기 시작하고, 불법적인 월강을 하면서 송화강과 두만강 사이의 비옥한 퇴적지를 뜻하는 은어(조선 관아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서)로써 “간도”가 사용되었다. 또한 이중적인 의미로 척박한 땅을 조선인이 개간해서 사용했던 땅의 의미로써 사용되기도 하였다.

1881년 청나라는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끼고, 공식적으로 간도 지역의 봉금령을 해제하였다. 우선적으로는 중국인들의 거주를 허용하였고, 1885년부터 허가된 조선인들의 정착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봉금령이 해제되기 전부터 조선인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북간도 위쪽인 연해주로 이주하거나, 간도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학자들은 간도 지역으로의 조선인 이주를 3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1860-1910년, 1910-1931년, 1931-1945년이다.

간도로 이주하던 주된 이유는 시기를 따라 달라진다. 1910년 이전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이주로, 다른 표현으로 경제 난민이다. 1910년 이후에는 일제시대의 정치적인 문제로 이주한 것으로 정치 난민 범주에 속하게 되고, 1931년 이후에는 일제에 의한 강제 이주가 주를 이룬다.

1881년 봉금령이 풀린 후, 많은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전쟁이다. 1894-1895년 청일전쟁과 1904-1905년 러일전쟁이다.

이북 지역의 경우 청나라 군이 남하하는 길목과 퇴각하는 길이 되면서 격전지가 되었다. 러일전쟁 당시, 함경도는 전쟁의 시작부터 끝나는 때까지 전쟁터가 되었다. 그 결과 함경도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다. 1910년 이전에 간도로 이주한 것은 전쟁에 의한 경제적 수탈을 피하기 위한 전쟁 난민이다.

명동촌 설립 당시의 시대상
김약연의 이주를 살펴보면, 1899년 2월 18일에 전주 김씨인 김약연의 집안 식구 31명, 김해 김씨 김하규 집안 식구 63명, 만평 문씨 문병규 가문 40명, 남도천 가문 7명과 통역관 김항덕 1명을 포함하여 142명이 함경북도 종성군을 떠나 용정시 화룡형 불굴라재에 정착하였다.
이후 이들은 이 지역을 ‘명동’이라고 불렀고, 그 뜻은 자신들이 정착한 땅의 동남쪽인 “고향 조선을 밝힌다”이다.

명동촌의 후예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체성 지켜주는 뿌리가 돼

한인교회는 자녀세대에게 민족과 신앙의 정체성 전해 주는 토양이 되어야

비록 척박한 간도에 정착하였지만 그곳에서 고향 땅을 이끌 인재가 나오는 꿈을 꾼 것이다. 142명이 처음 정착한 후, 일 년 뒤에 윤하연과 그 가족이 명동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만주로 이동한 이들은 약 600만 평 크기의 땅을 구입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훗날 이 땅은 생활, 교육, 독립운동을 위한 토지의 용도로 나누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진행된 것은 명동촌에 정착할 때는 아니었기에 처음 정착할 때는 땅을 각 가문의 투자금에 따라 분배하고, 그중에서 일부분의 땅을 학전(學田)으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공동 재산으로 사용하였다.

문익환과 문동환의 아버지인 문재린 목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주의 목적은 “첫 번째는 우리 옛 조상의 땅을 우리가 들어가서 되찾는다는 것. 두 번째는 북간도의 넓은 땅을 활용해 이상촌을 건설하려는 것. 세 번째로는 추락하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인재를 교육하려는 뜻”이었다. 조상의 땅에 대한 내용은 학자들에 따라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과 함께 더해진 민족주의적 내용이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는 큰 이견없이 받아들여진다.

그 이유는 명동촌의 성격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대숙은 명동촌을 포함한 간도 이주자들의 특징으로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항산이란 경제적인 이유가 주된 이주의 원인이었기에 안정적인 수입원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을 뜻하고, 항심이란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이러한 간도 이주자들의 특징에 교육열이 더해졌다.

김약연이 명동촌으로 이주했을 당시에 그 지역은 황무지였고 경제적인 안정성을 위해서는 토지를 개간하여야 했다. 또한 거주하는 사람들이 없던 지역에 정착했기에 교육시설도 없었다. 그렇기에 첫 이주를 온 가문들은 자신들의 서당을 설립하였다. 김약연은 자신의 호(규암)를 따라 규암재를, 김하규는 소암재를, 남종구는 오룡재를 설립하였다. 그곳에서 전통적인 한학을 가르쳤으며, 명동촌의 아이들은 글과 생활원칙을 배울 수 있었다.

김약연의 생애 요약
규암 김약연의 생애를 살펴보면, 1868년 12월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아버지 김석조와 어머니 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용구이고, 호는 규암이다. 학구열이 넘치던 김약연은 유학자였던 남종구의 밑에서 유교를 배우고, 실학의 흐름을 따라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1875년에 안연과 결혼하여 3남 1녀(김정근, 김정훈, 김정필, 외동딸 김신복)를 두었다.

1899년 2월 2일에 중국명으로는 장재촌이라 불리던 곳을 명동촌으로 부르며 자신들의 정착지로 만들었다. 1901년 첫 교육기관인 규암재를 설립하였고, 이는 1908년 다른 두 서당과 합하여 설립한 명동서숙의 기초가 되었다.

명동서숙은 1906년 이상설이 용정에 설립하여 1여년간의 짧은 시간에 신식교육을 가르치던 서전서숙을 따라 설립된 것이다. 명동서숙을 설립한 후 1908년 신식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정재면을 초청하면서 1909년에 명동학교로 개명, 김약연은 명동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명동학교로 바꾸면서, 장재면의 요청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김약연은 1915년 명동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1929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 후, 1930년 목사안수를 받아 명동교회로 부임하였다. 그 사이 김약연은 1919년 3.13일 용정 독립선언서 발표 당시 민족대표로 활약했으며, 그 결과로 1920년 감옥에 수감되어 1922년에 출옥하였다.

감옥에 있는 2년 사이에 명동학교 건물이 불에 타 소실되었지만, 김약연이 출옥한 1922년에 마을 사람들이 새 교사를 지었고, 계속해서 교장직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1925년 명동학교는 폐교되었다. 신앙과 교육, 민족을 위한 삶을 살던 규암 김약연은 1942년 10월 29일 용정에서 병환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명동촌과 김약연의 세 가지 모습
규암 김약연은 교육지도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종교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명동촌은 교육열이 넘치던 마을로 그 중심에 명동학교가 있었다. 명동학교는 1906년 이상설이 용정에 세웠던 서전서숙이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제2차 세계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게 되면서 설립 1년 만에 폐교를 당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김약연이 명동촌에 있던 세 개의 서당을 하나로 합쳐 명동서숙을 설립하고 서전서숙에서 가르치던 교사들을 채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단 2년 만에 명동서숙의 학생수가 160명으로 급증하던 차에 1911년 상동청년회와 신민회에 속해있던 장재면을 소개받게 되었고, 장재면은 명동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예배 드리는 것을 명동학교 교사 참여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전통적인 유교 마을인 명동촌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며칠간의 마을 원로들의 토론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명동학교의 특징은 단순하게 지식만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닌 ‘기숙사 제도’에도 있었다. 학전을 통해 재정적인 부담 없이 자녀들의 교육을 공동으로 담당했던 전통을 따라 명동학교는 공동체 생활을 배우는 기숙사도 원칙적으로 무료였다고 한다.

명동학교의 교장으로서 명동촌의 교육을 책임졌던 김약연이 생을 마무리 하며 남긴 마지막 말은 “나의 유언은 나의 행동이다”였다. 즉, 명동학교 교육의 핵심은 지행합일로, 지식 교육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실천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였다.

김약연과 명동촌의 두 번째 특징은 “민족”으로 조선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명동촌이 안정되게 정착하면서 김약연은 명동촌만의 지도자가 아닌 간도지역의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다.

토지 소유권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중국인들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을 경우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김약연은 중국에 “타국에서 언어, 풍속, 성격이 다르기에 민족자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민족교육을 할 수 있는 ’간민교육회’ 설립 허가를 받았다. 조선인들 중심의 교육을 할 수 있는 자치회가 설립된 것이다.

그 후 1913년 간민교육회를 토대로 조선인 자치기관인 “간민회”가 설립되었고, 북간도 조선인들의 민생, 교육 등을 주관하여 그 지역의 민족적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는 1919년 3.1 운동과 연계되어 1919년 3월 13일 “명동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용정에서 3.13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일제는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를 지목하고 간도 지역의 교회와 학교를 박해, 파괴하였고 명동학교 또한 이때 소실되었다.

그리고 3.13 독립운동을 진압하던 중 학생들이 총에 맞아 죽음을 당하는 일을 겪게 되며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명동학교는 민족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하였고, 김약연 역시 최선을 다하여 독립자금을 모아 독립군들을 도왔다.

1920년 1월 4일 일제의 철도 개설 자금인 15만환 탈취 사건이 일어났는데 김약연의 제자들이 그 일을 주도하였다. 그로 인해 김약연은 독립자금을 모금하러 다니던 중에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명동학교는 학교에서 독립군 병창과 같은 역할로 바뀌어갔으며, 그 결과로 명동학교는 소실되었다.

명동촌 사람들은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민자와 난민으로 힘든 삶을 살지라도 그 삶의 목적을 개인의 성공과 평안으로 삼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과 교육이 연합되어 더 큰 힘을 발휘하였다.

셋째, “명동촌의 종교, 기독교는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에 머무는 개인적 종교가 아니라 노예의 처지에 신음하는 당시의 민족 전체를 살리는 출애굽의 종교였다.” 명동촌의 시작은 기독교 마을이 아니었지만, 훗날 명동촌과 간도 일대는 기독교 중심의 마을이 되었다. 또한 명동촌에 살던 사람들은 그곳을 천당골로 만들고자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고 예수를 독실하게 믿고 성령으로 감화를 받은 천당골 사람들이란, 첫째로 훌륭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둘째로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며, 셋째로 참 애국자로서 삶을 살아가야만 천당골(명동촌)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명동촌은 기독교의 정신으로 이웃과 상생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또한 김약연의 인생도 기독교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명동학교가 교육의 장보다는 무장 독립투쟁을 위한 병참기지의 역할이 커져가고, 1924년 만주지방의 극심한 흉년의 결과 폐교되었다.

명동학교가 왜 폐교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은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재정적인 이유뿐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확산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명동학교에서 기독교 중심의 종교교육을 강화하던 김약연의 방침에 반하여 사회주의에 가담한 학생들은 교장 퇴진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약연은 제자들이 신앙을 지키며, 동시에 민족을 위한 삶을 살기를 꿈꿨기에 학교를 폐교하고 캐나다 선교부가 운영하는 용정의 은진학교로 학생들을 전학시켰다.

그 후, 김약연은 스스로 신앙과 삶의 일치를 위해서 61세의 고령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민족운동을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자와 비사회주의자로 나뉘는 것을 경험하고, 기독교 안에서도 나뉘는 것을 보며 혼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이 믿는 신앙을 더욱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만학도가 되었다. 그 후 1930년 목사 안수를 받아 명동교회로 부임하였다.

고 규암선생기념비제막식출처독립기념관

마무리
일제의 억압과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사람들은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새로운 땅이었고, 낯선 곳이었으며, 척박했고 정착하기에 어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김약연과 명동촌 사람들은 교육과 민족, 신앙을 가지고 마을을 세워갔다. 하지만 과거 많은 이주민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밝은 빛이 되었던 곳이 일제의 억압과 시대가 변하면서 빛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빛을 잃은 것일까? 명동촌이 사라졌음에도 그곳에서 신앙으로 자라난 자녀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땅에서 자신들과 같이 소외와 갈라짐의 아픔이 있는 곳에 빛이 되었다. 또한 이미 잊혀진 것 같은 그 땅에서도 명동촌의 후예들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뿌리가 되었고, 연길에 남아있는 큰 기독교 교회는 자녀 세대들에게 민족과 신앙의 정체성을 전해주는 토양이 되고 있다.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한인 교회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떠한 모습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은 다음의 과제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김형균 목사/장신대 신학과 및 신대원과 일반대학원 졸업, 뉴질랜드 오타고대학 첫 한인 신학박사(실천.선교 및 종교사회학).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선교사. 파머스톤노스 한마음교회 담임 목사. 명동촌과 김약연 목사의 삶을 통해 한인 이민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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