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목댕기 맨 원주민 선교사

뉴질랜드 최초 교민 교회를 설립하였고,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에서 원주민 사역을 하며 기독간호대학을 설립, 미개한 원주민들의 영육을 치유하는 학원 사역의 사명을 33년 동안 감당하고 있는 김용환 목사의 뉴질랜드 & 바누아투 30년 선교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8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누아투 섬나라 목회자들 및 원주민 사역자들의 교육과 극빈 사역자들을 위한 생활 및 의료 지원 등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으로 아직 활발하게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1부 출생과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과 군대 생활, 병리 공부와 신학교, 미국 유학 시절, 병원 원목 생활과 개척 교회, 기도 응답 그리고 수술 기도, 뉴질랜드 선교사로 파송, 한인교회 개척 이야기, 바누아투 선교 이야기, 바누아투 수도에 기독간호학교를 세우다, 한국과 바누아투 장로교회, 동역 관계 체결하다, 바누아투 선교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2부 은퇴 후 나의 생활, 나의 감사가 있다.

나는 <목댕기 맨> 목사이다
저자는 농촌에서 농사만 아는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 말년, 농장 감독관을 보며 ‘나도 저런 목댕기(넥타이)를 매고 신사 양복을 입고 여러 농부를 감독 관리하는 아들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시던 아버지의 평생소원이 되어 그때부터 초등학교에 보내 공부 시키기로 결심하셨기에 생존해 계실 때 고향에 갈 때마다 “아버지 목댕기 맨 아들이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목댕기 맨 농감보다 목댕기 맨 목사님이 훨씬 더 높아요”라고 한마디 덧붙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모태신앙을 가지고 어릴 때에 받은 신앙 교육은 삶의 바른 방향을 정해 주었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고, 십일조 헌금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며, 항상 욕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싸움하지 않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일학교에서 배웠다. 이런 신앙교육이 오늘 나를 목사가 되게 한 것 같다.”
열네 살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정 형편이어서 어린 마음에 유일한 기도 제목은 “하나님 나도 중학교를 가게 해주세요!”였다.

1949년 빨치산 부대와 공비들이 양민들을 학살하는 가운데 교실 마루 및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 저를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만약 빨치산 공비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를 경찰로 오인하여 총을 쏜다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저를 살려 주시면 앞으로 목사가 되어 하나님 일을 꼭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약속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서원 기도한 대로 살려 주셨고 일꾼이 되어 지구 최남단까지 와서 종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유년 시절부터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과 군대 생활, 신학생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 쉽지 않은 가난과 고난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 맡기며 인도하심을 따라간 것이다.

나는 <펌퍼맨> 목사였다
목회를 하는 중에 좀 더 배워 학원 사역이나 기관 사역을 한번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여러 차례 미국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던 중 시무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미국 플로리다 바이블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며 학기 중에는 근로장학생으로, 방학에는 주유소에서 펌퍼맨으로 일하며 버텨내었다. “지금도 미국 하면 패트롤 펌퍼, 그래서 미국은 나에게는 주유소를 통하여 좋은 인생 경험을 주었던 잊지 못할 나라이다”

귀국 후 병원교회를 중심으로 원목 사역을 하였다. “매일매일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찬송하며 예배드렸던 그 사역들을 회상하면, 내 생애 가장 가치 있고 사역의 보람을 느낀 3년간의 좋은 경험으로 여겨진다. 그런 뜻깊은 사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마음 깊이 감사한다.”

나는 <목댕기 맨> 원주민 선교사다
첫째, 뉴질랜드 안에 사는 우리 동포 선교, 둘째, 남태평양 섬나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역을 다 하라는 총회장의 권면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1985년 10월 16일 한국 장로교단 총회에서 뉴질랜드 최초 한국인 선교사로 뉴질랜드 장로교단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2월 첫 주일 웰링턴 한인교회 설립 예배를 드렸다. 이후 8년 동안 선원 선교와 교민 목회를 하였다.

“나를 파송한 한국장로교 총회의 당부와 요청을 수행하고자 뉴질랜드의 3대 도시인 웰링턴, 오클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한인 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1993년 2월, 바누아투와의 교통의 요지가 되기에 선교센터로 적합한 오클랜드를 선교 기지로 정하고 오클랜드 제일교회 사역을 하면서 바누아투 선교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90년 7월 15일, 바누아투에 첫발을 내딛고 지금까지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오지에 교회를 세워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심어 주고 영육을 모두 치유하는 사역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누아투 원주민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지 않음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선교를 목적으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훈련한 후 원주민 마을로 파송한다면 원주민들의 영육을 치유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누아투 수도 포트빌라에 코르반 기독보건간호학교가 세워졌다.

“오늘 나는 지난날 나의 바누아투 선교 사역을 한 번 더 되돌아본다, 낙후된 지역 지역에 바람과 태풍만 불었다 하면 쓰러져 버리는 예배 처소 문제로 시멘트 콘크리트 교회를 달라는 것이 매일의 기도 제목으로 삼았던 그들에게 태풍이 몰아쳐도 안전한 23개의 시멘트 블록 교회 건축을 지원하고 설립했다.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살았기에 30도가 오르내리는 그 무더운 열대지역에서 병이 났다 하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손을 쓰지 못하고 눈앞에서 방법이 없어 열병으로 죽어 가던 그들에게 질병에 대한 예방과 간단한 치료를 했고, 치료와 더불어 복음을 치유와 함께 겸하는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교육 기관인 간호학교를 세워 지역 지역에서 복음과 치유 사역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생각하면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90년 7월 15일,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에 선교의 첫발을 디딘 후 오늘 2020년까지의 나의 선교 사역의 활동을 회상하면 어려웠던 일, 힘들었던 일, 위험했던 일도 많았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었고 뎅기열로 생명의 위협을 겪기도 하였는데 그 많은 일 중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어 세 가지 큰일을 별 어려움 없이 이루게 하셨음을 진정 마음을 다하여 감사 또 감사를 드린다. 그 세 가지 일이란 첫째로는 23개 교회 개척 및 지원, 둘째로는 기독간호학교 설립, 그리고 셋째로는 오랜 전부터 바누아투 장로교회가 그토록 원했던 한국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과의 파트너십 관계를 맺게 한 것이다.”

필자가 뉴질랜드에서 만난 대선배 목사님의 삶과 사역을 한 권의 책으로 대하니 너무나 귀한 부르심과 응답과 헌신의 삶이 귀감이 된다. 2000년에 온 나로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일들을 감당하시고 이겨 내신 선배 선교사로서 아직도 왕성하게 사역을 지속하고 계시는 모습이 도전 된다.

늘 겸손히 사랑으로 후배들을 챙기시는 어르신의 모습이 앞으로 이 땅에서 은퇴하면 닮고 싶은 모습이어서 좋다. 한 사람을 부르시고 훈련하시어 귀한 선교 사역에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손길을 이 책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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